박석환, 엄마찾아삼만리의 김종래, 만화규장각, 2007.3.11

김종래(1927년 생)는 박기당 박광현 추동식 신동우 등과 함께 60년대 우리만화 1세대를 이끈 주역 중 한명이다. 

40~50년대 활동한 김용환 김의환 김성환 등이 신문과 잡지를 중심으로 현대만화의 출발점을 만들었다면 이들은 빌려보는 형식의 만화방이라는 구조를 통해 만화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만화구독인구와 맞물려 만화창작 제작 형식에서도 대량의 작품 생산라인을 조성하게 된 60년대는 이런 이유로 우리만화의 첫 번째 전성기로 꼽힌다. 김종래는 그 전성기의 중심에서 전통 극화체의 전형을 구축했던 작가이다. 

일본 쿄토 출생인 김종래는 피난으로 대학생활을 그만둔 1945년까지 쿄토회화전문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20여 년을 살았던 김종래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조국으로 돌아와 충남 당진에서 기거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호칭은 쪽발이가 됐다. 1947년 자원입대를 결정하고 1954년 상사로 제대할 때까지 7년 간의 군복무를 마쳤다. 군 생활 중이던 1952년 윤군본부 작전국 심리전과에 배속, ‘코주부’ 김용환의 후임으로 전단 그리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이때 작업한 반공만화 <붉은 땅>이 인연이 되어 김종래는 뜻하지 않았던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김종래의 만화는 한편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붓터치와 깊이가 느껴지는 농담, 단아함과 함께 서정성을 묻어나게 하는 깔끔한 펜터치로 대표된다. 

<엄마찾아 삼만리> <어머니> <마음의 왕관> 등을 필두로 그가 남긴 500여 권의 작품에서도 이 같은 운치가 오롯하게 살아있다. 추리형사물 정도로 분류될 수 있는 <암행어사> <박문수전>에서도 심파조에 가까운 김종래 특유의 서정성은 되풀이된다. 대사보다는 지문을 많이 사용하고 움직임선 등 만화적 기호보다는 정지 묘사에 능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투톱으로 불리며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박기당은 김종래와 함께 전통 극화체를 구축한 작가였지만 작품성향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같은 사극만화라 할지라도 박기당은 괴기담을 그렸고 활극이나 SF 등을 넘나들었다. 라이벌이었지만 절친했던 박기당은 ‘종래 너는 밤낮 울릴 생각만 하냐’고 놀렸다고 한다. 

조센진에서 쪽발이까지 그의 성장기는 따돌림의 연속이었다. 

내 것이 없고 잃어버린 것만 존재했던 그의 성장배경은 끝없이 도망 다녀야 하고 한없이 그리워해야만 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작품도 꼭 그렇게 채워졌다. 김종래는 문하생에게 엄한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현역에서 활동 중인 한재규(명지대학교 만화과 교수) 홍금보(박봉성의 <삼국지> 그림작가) 등이 그에게 전통극화체를 사사 받은 후학들이다. 1975년 김종래는 건강 등을 이유로 만화계를 떠나고 동양화를 다시 시작했다. 김종래가 원했던 것은 산수화와 미인도를 결합한 형태의 산수미인도. 그러나 지병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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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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