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코주부의 김용환, 만화규장각, 2003

코주부 김용환, (C) 임응식사진아카이브

 

김용환(1912년 생)은 초창기 우리만화의 여러 하부장르를 구축해낸 선구자 중 한명이다. 고교 졸업 후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용환은 가와바다 미술학교(무사시노 미술대학으로 개명)에서 데생 공부를 하고 데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실기 중심의 교육을 받았다. 

유학경비 마련을 위해 삽화가로 활동했는데 당시 일본의 권위 있는 소년잡지였던 <<니혼쇼넨>> 등에 기다 코지라는 이름으로 삽화를 연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일본 최대 출판사 중 하나인 고단샤에 근무하던 중 일본의 징병제도를 홍보하는 일어판 월간잡지 ‘렌세이노 도모’의 한국 내 발행을 위해 서울에 돌아왔다. 

 

해방 후 <<서울타임스>>에 <코주부>를 발표하면서 당대 최고의 만화작가로 자리 잡았다. 특히 시사만화, 삽화, 아동만화 등에서 보여준 발군의 실력은 동생 김의환, 후배 김성환과 많은 차이를 보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용환의 데뷔작은 1936년 <<신동아>> 5월호에 수록된 ‘모던 미발’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고, 그의 대표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는 ‘코주부’는 1942년 <<일본도쿄조선민보>>에 처음 게재됐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작가로서 첫 번째 전성기를 일본에서 누린 김용환은 해방 후 서울을 중심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김용환은 <<중앙신문>> 등의 정치풍자만화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다수의 신문에 복수 연재를 하는 한편 여러 출판사로부터 아동만화 창작 요청을 받아 밤샘 작업을 밥 먹듯 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렸던 작품이 마해송 원작의 <토끼와 원숭이> 등이었다. 

 

김용환의 작품 성향은 크게 기록사진보다 섬세한 풍속화와 삽화, 풍자성이 강한 간략한 만화풍의 시사만화와 아동만화로 나뉜다. 시사만화는 선전용으로 아동만화는 계몽용으로 국한되었던 부분도 없지 않지만 어른에서 아이까지 당대 대중의 기호를 가장 정확하게 어루만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1949년 그가 주도했던 <<만화뉴스>>는 4만5천부라는 경이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김용환은 김규택 신동헌 김경언 김정파 김기율 이원수 등과 함께 ‘대한만화가협회’를 설립하고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일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기다 코지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그가 한국만화사에 남긴 족적은 약 14년가량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세월을 전쟁의 불안 속에서 또는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품 활동을 해야 했다. 해방 전에는 일본군의 한국인 징병을 선전하는 친일만화가로, 해방 후에는 남로당의 당원으로서 인민군의 선전용 포스터를 제작했다. 미군과 국군의 서울 탈환 후에는 다시 육군본부 작전국의 심리전과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59년에는 일본 주둔 유엔군 사령부의 만화담당기자로 일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간혹 한국의 신문 잡지 등에 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없었다. 1993년 수제자인 이원수에게 ‘코주부’의 창작권을 넘기고 1995년 미국으로 이민, 1999년 여생을 마감했다. 그의 동생 김의환도 동시대를 풍미한 인기만화가였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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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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