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 속의 신화 : 시스템화 된 신화의 폭력성, 예장, 서울예술전문대학교, 2002


만화, 예술보다 폭력적인


희생제의를 통한 폭력적 신화 만들기 


<그리스로마신화>는 창건자 가문의 가족사이고 왕조사이다. 우라노스가 모친 가이아와 근친상간을 함으로써 가족사는 시작된다. 둘 사이에서 세명의 거인족과 열 두명의 티탄족이 태어난다. 가이아는 막내아들 크로노스에게 아버지의 생식기를 자르게 했다. 크로노스는 누이 레아와 결혼하고 부친의 왕위를 계승한다. 자식에 의한 권좌 축출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식들을 잡아먹는다. 이를 본 부인이 셋째아들 제우스를 숨겼고 양형제와 함께 성장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입에서 형제들을 끄집어내고 지하세계에 갇혀있던 거인족 삼촌들을 구출한다. 거인삼촌들은 조카 제우스에게는 벼락을, 하데스에게는 투명해지는 모자를 포세이돈에게는 삼지창을 주어 무장시키고 크로노스를 죽이게 한다. 이후 삼형제는 세상을 육지, 지하세계, 바다로 분할해서 다스린다. 제우스는 자기 세상이 되자 온갖 방식으로 여자관계를 맺고 자식을 낳았으며 각종 주특기를 지닌 신들의 아버지가 됐다. 아버지 살해라는 희생제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구축한 것이다. 

인류학자로서 더 큰 업적을 남긴 문학비평가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폭력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지라르는 ‘모든 사회적 질서는 기원적인 폭력의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질서를 창건하려는 자는 여러 명의 경쟁자를 만나게 되고 이를 제거해야 새 질서가 이루어지는데 이때 발생하는 폭력을 기원적 폭력이라 했다. 이를 정당화 시키는 종교적 의식(제의)은 그 폭력을 신화의 형태로 미화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창건자가 저지른 박해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이고 사형집행인들이 희생자의 유죄성을 믿도록 쓴 텍스트라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의 연계 고리로 이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 창건자는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만인의 동의를 얻어 희생제의를 진행하고 자신이 저지른 기원적 폭력을 비폭력화 시킨다. 이처럼 창건자 이야기인 신의 이야기는 폭력의 비폭력성을 증거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고, 희생양에 대한 만인의 폭력을 담고 있다. 이 같은 기준에서 보는 신화는 신들의 폭력에 대한 사건경위서이고 자술서 또는 재판 판결문이다. 신화는 특정 폭력행위 및 사건에 대한 판결 사례이고 폭행치사범 또는 전쟁 우발범이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는 선례이다. 


신화체계의 이야기화 또는 폭력의 장르화 


사건이 발생한다. 인류문명을 위협하거나 자칫 큰 인명피해를 입을 수 있는 등의 긴박한 상황이다. 한 인물이 등장해서 이를 해결한다. 해결사는 영웅이 됐지만 그 덕분에 사건을 발생시킨 사람이나 집단의 표적이 된다. 혼자 힘으로 싸울 수 없음을 인식한 해결사는 자신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는 이들을 끌어 모아 팀을 꾸리고 사건을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적과의 사랑 또는 팀 내에서의 사랑이 가미된다. 둘이서하는 사랑인 탓에 다른 이들과의 갈등이 증폭된다. 해결사의 등장이나 해결사가 사건 발생의 주체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태생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성장환경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교육된 사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폭력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명분으로 자행된다. 폭력은 악인의 등장 또는 자의적 설정만으로 비폭력화 된다. 비폭력화를 위한 희생제의는 치사하지 않은 방식으로 멋스럽고 화려하게 응징을 가하는 것이고 이를 만인에게 심심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덧붙이자면 사랑의 감정 때문에 팀 내 갈등을 조장하고 위기를 초래한 부분 역시 아름다운 로맨스로 해결해 버린다. 물론 다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 즉결 심판을 내린다). 

이것은 허리우드적 영화의 관습화 된 이야기 구조이고 폭력과 섹스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기이한 사건과 화려한 볼거리,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위험한 사랑, 이분법적 대립구도와 끝없는 싸움 등.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2시간 여 동안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온갖 장치가 스크린 위에서 펼쳐진다. 새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도 있지만 낯설면 절반도 못한다는 절박감도 있다. 익숙하면서 새로운 영화상품을 만들기 위해 허리우드적 영화가 선택한 것은 소재주의와 스타시스템이다. 익숙한 이야기구조를 중심으로 특이한 소재와 독특한 캐릭터의 스타를 적용하면 안돼도 본전이라는 수칙. 이 수칙은 허리우드적 영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적용되고 있는 흥행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이른바 허리우드적 흥행 안전장치의 삼박자는 익숙한 이야기구조와 스타 그리고 독특한 소재이다. 여기에 별첨 형식으로 따라 붙는 것이 이야기구조의 반전, 스타이미지의 재해석, 소재의 확대(대상층 확대를 위한)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익숙한 이야기구조를 이루는 것이나 스타의 이미지가 곧 신화이다. <성서>나 <그리스로마신화> <삼국사기> <인도신화> 등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맥락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인류가 공통적으로 창작하고 창작해낸 옛날이야기의 매력이 곧 신화체계이다. 이는 원형으로서의 문학뿐만 아니라 시각 이미지 중심의 대중문화 전반에 원초적 재료 또는 도구로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출판영화라고 할 수 있는 만화와 실사영화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꿈꾸기를 금지 당하던 시절의 애니메이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창세신화는 신적 존재로 등장한 외계인들이 지구별에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인용됐고, 건국신화는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은 땅따먹기 선수들의 세력화 싸움으로 재현됐다. 폭력적 행위의 결과로 구축된 가족사를 중심으로 전쟁과 사랑의 서사를 담고 있는 신화는 곧 전쟁 시대 액션 모험 추리 공포 연애 멜로 에로 등의 장르를 구축하는 토대가 된다. 허리우드적 영화의 가장 상업적인 형태를 소재주의나 형식주의에 입각한 장르영화라고 한다면 사진과 영사기술의 발명 또는 그 결과물의 발견 이후 구체적 창작론을 학습한 만화책 만화-고전적 만화의 형태인 벽화나 신문용 코믹스트립이 아닌 코믹북 그래픽노블 망가(일본만화) 방드데시네(프랑스만화)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만화-는 장르라는 관습성 자체를 기원으로 한 창작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계 현대만화(일본 스토리만화의 영향 하에 있는)는 대개 다음과 같은 주제를 지니고 있다. 소년 만화의 경우 꿈 도전 성취, 청소년 만화의 경우 젊음 낭만 패기(순정의 경우 사랑 동경), 성인만화의 경우 직장 여자 성공 등이다. 각기 다른 독자층을 대상으로 나름의 컨셉을 표방하고 있지만 대개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별 볼일 없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에 하나의 꿈을 지니게 된다. 죽도록 노력하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천부적 재능이 작용한다. 이를 주변에서 도와주는 이가 있고 방해하는 이가 있다. 방해하는 이는 일종의 적대자로 같은 꿈을 지닌 라이벌 또는 도전해야 할 최상위 목표이다. 목표를 향해 가기위한 무수한 계단이 있고 이 계단 하나하나에는 사건과 승부가 벌어진다. 갈수록 힘이 들어 포기하려고 하지만 몇 가지 이유(과거에는 부모에 대한 복수심이었고 연애 싸움으로 바뀌었다가 가장 최근에는 이유 같지 않은 황당한 이유로 바뀌고 있다)가 힘을 주고 최상위 목표를 달성한다는 식이다. 여기서 꿈은 스포츠나 잡기의 1인자일 수도 있고 싸움이나 돈벌이일 수도 있으며, 범인 체포나 인류 구원 또는 연애의 완성일 수도 있다. 좋은 만화와 나쁜 만화의 구별을 이처럼 규범화된 이야기 구조를 지점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만화와 재미없는 만화의 구분은 충분히 가능할 정도이다. 국내 환경에서 (만화가게 또는 대여점)에서 만화를 분류하는 방식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액션 무협 순정 성인 코믹스가 그것으로 A5판형의 청소년용 만화출판물을 코믹스로 규정한 것 외에는 정형화 된 창작 스타일과 도서제작 스타일이 존재한다. 코믹스 내부에서 소재에 따른 분류 방식을 시도하고 있으며 학원폭력 러브로망 공포 판타지 SF 추리 잡기(전문가) 직장인 등의 세부 장르가 나뉜다. 각각의 장르는 매우 창의적인 작가와 작품의 등장으로 일종의 모델이 형성되며 그 모델에 입각한 작품의 종수가 늘어나면서 특정 장르가 구축된다. 


액션 영웅 만화와 만화 주인공의 신화 따라잡기 


미국 주류 만화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히어로 코믹스는 장르화 된 만화의 예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화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DC코믹스(www.dccomics.com)와 영화원작을 만화화하는 다크호스(www.darkhorse.com). 이 두 출판사는 미국만화 시장을 대표하는 한편 미국 출판만화의 주요한 창작 형식과 유통 구조를 구축해왔다. 이들 출판사의 대표적 만화시리즈는 슈퍼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 이른바 ‘쫄바지 액션 영웅 만화’이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몇 십 년 전에 만들어진 이 할아버지 캐릭터의 권리를 출판사가 관리하며 스튜디오 창작 시스템을 동원해 현재까지 젊고 싱싱한 액션 영웅으로 사육하고 있다. 액션 영웅 만화의 작화 스타일이나 유통 시스템은 나름의 변화를 겪어 왔지만 이야기 구조나 방식에 있어서는 소재를 달리하는 것 외에 변화가 없다. 

모두가 알고 있는 <슈퍼맨> 이야기는 이렇다.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닌 초인간 주인공이 등장하고 자신의 능력을 버려도 좋을 만한 연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연인과 인간의 질서를 위협하는 무리가 나타난다. 인간의 질서를 위협하는 그 무리는 자신과 같은 태생의 초인간이다. 주인공은 자신과는 별 무상관인 인간을 위해 자신의 종족을 살해하고 인간 세계의 질서를 유지시킨다. 종족살해와 만인의 동의를 얹어 자행하는 희생제의의 폭력성 등이 그대로 신화를 닮았다. 인류의 공통적 무의식이 만들어냈다는 원형적 이야기나 이미지 또는 그것의 결과물로서의 신화 그대로이다. 이로인해-사랑이나 연민의 감정 때문에 종족을 배신한 것으로 슈퍼맨은 만인의 영웅이 되고 슈퍼맨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라는 형질을 지닌 원형적 이야기 체계가 된다. <슈퍼맨>의 인기는 비슷한 유의 작품을 등장시키고 동일 성향의 작품군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히어로물이라는 한 장르를 구축하고 미국만화의 전형성을 담고 있는 주류만화가 된다. 

맑스주의 철학자 중 한명인 게오르그 루카치는 19세기 역사 소설에 나타난 인물 창조(characterization) 방식을 전형화(typication)라 표현했다. 역사소설가들이 개인적 운명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예외적 영웅이 아닌 한 계급의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주인공을 창안하고 영웅적 행위를 민중 속에서 찾은 것을 뜻한다. 이는 영웅과 민중이 별개가 아니라는 일종의 탈바가지 효과(캐릭터와의 동일시)를 이용해서 문학의 실천과 민중의 참여를 이끈 수단이다. 이 같은 전형화는 만화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으로 영웅화된 주인공과 독자를 일치시키기 위해 초인간 주인공에게 인간적인 면을 부여하고 있다. 즉 슈퍼맨은 평상시에는 독자들과 동일하게 능력 없는 직장인이고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변신을 할 수 없다. 또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의 자기 동일시를 이끌어 낸다. 슈퍼맨의 독자층이 모두 성장해서 더 이상 만화를 읽지 않는 연령층이 되었을 쯤 출판사는 슈퍼보이를 만들기도 했다. 청소년층이 보기에 늙다리 슈퍼맨이랑 자신이 동일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2세 전략 또는 어린 액션 영웅의 등장은 또 한번 이 장르만화의 소재 또는 내용에 있어서의 관습성을 만들어낸다-슈퍼걸의 등장은 성인 독자들을 위한 일종의 판타스틱 이벤트였다. 남성 중심 독자층의 관음 취미를 만족시켜주는 한편 독자가 슈퍼맨과 동일시되는 것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슈퍼맨이 되면 슈퍼걸과의 연애체험이 가능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사항은 슈퍼맨이 종족살해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혈통보존의지도 지녔고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는 청교도적 영웅임을 강조할 수 있는 장치라는 점이다. 이런 단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이야기체계를 빌려 탄생한 외계의 폭력 영웅이 미국을 상징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으면서 신적 존재가 되고 신화를 만들며 신화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신화 또는 장르만화의 태생적 폭력성이 낳은 <천국의 신화> 


우리사회 교양인들의 신화 읽기가 일종의 패션이 되면서 아이들에게도 좋은 옷 입히듯 신화를 읽히려는 바람이 드세게 불고 있다. 아동용 <만화 그리스로마신화>가 100만부를 넘게 팔면서 그 유행의 제일선에 섰다. 물론 이 같은 패션의 바람을 먼저 읽었던 이는 인기 만화작가 이현세였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바람은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독자들이 판단하기에 따라-촌스러운 바람과 신화는 음란하고 폭력적이라는 검열바람이었다. 

우리에게 건국신화는 있으나 창세신화는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는 작가는 총 100권의 규모로 <천국의 신화>를 기획 창작했고 몇편 내기도 전에 검찰출두 명령을 받았다. <천국의 신화>가 폭력적이고 음란하다는 것이고 음란물 배포죄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보호법의 발동, 스포츠신문 연재만화와 영화 <거짓말>의 음란성 시비 등이 맞물리며 이 사건은 수많은 이슈를 만들었고 <천국의 신화>라는 작품 자체를 음란 폭력 또는 창작의 자유와 연관된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얼마전 무죄가 판결됐다는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이 사건은 2002년 10월 현재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천국의 신화> 사건이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 당시 이현세는 ‘신화가 폭력적이고 음란하다는 거냐?’며 반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종의 전재서사극의 형식과 전쟁이 동반하는 부도덕한 연애 또는 강간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신화는 다분히 폭력적이거니와 현대성의 기준으로 볼 때 음란하기도 하다. 아동용 학습참고서의 형식을 지닌 <만화 그리스로마신화> 역시 아이들이 읽는 것임에도 ‘가족 간의 결혼’이나 ‘침대 길이에 맞춰 몸을 자르는 등’의 폭력적 묘사를 가감 없이 다루고 있다고 해서 언론과 일부 독서지도교사들이 수선을 떨기도 했다. 신들의 이야기라는 면죄부를 땐다면 신화 속에 형상화 된 인간형 신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현대성의 윤리기준으로는 쉽게 납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 남녀관계로 이뤄져 있다. 

이현세는 원형적 이야기 구조와 장르만화의 관습성을 대표하는 폭력과 섹스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대중작가이고 이를 극적 긴장감으로 구성하는데 익숙한 프로이다. <천국의 신화> 초기에 보여준 몇몇 장면 연출은 사회 질서가 구축되지 않은 원시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아직 신을 만나지 못했다’라는 지문으로 시작되는 작품은 무질서와 혼란이 반복되는 시기를 본능적 폭력과 섹스로 극렬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폭력과 섹스가 아닐지라도 보는 이들이 이를 사회기능이 없는 사회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상징이 될 수 있다. 이현세가 이야기하는 인간이 신을 만났을 때 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전쟁을 도모하고 근원적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체제 조성의 전초전으로 묘사되고 폭력은 미화되며 폭력을 통해 강제화 된 규칙은 신성시된다. 인간이 그렇게 신을 만나서 사회가 만들어지고 질서가 형성되며, 질서 유지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쌓은 성은 군대 유치로 이어지고 성 내 식량 확보를 위한 성 밖 약탈은 또 하나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고로 이현세가 독자와 만나게 해준 신은 폭력적 전사의 모습이고 침략신 또는 약탈신이다. 이는 앞서 예시한 미국의 액션 영웅만화와의 차별점을 분명히 한다. 액션 영웅만화는 신화체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인공의 침략을 다루지 않고 침략에 따른 응징만을 다루면서 제의적 성격-폭력에 대한 독자의 용인-을 강하게 작용시켜 폭력을 융해시켰다. 이는 어린이 시간대에 방송되는 로봇물 애니메이션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 방식이다. 격투 로봇이 등장하는 만큼 폭력은 드라마의 가장 큰 구성요소 중 하나이다. 이를 활용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경찰은 절대 먼저 총을 쏴서는 안 되는 것 마냥 아군의 로봇은 적군 로봇이 무언가 큰 피해를 입혔을 때야 비로소 출동한다. 

이현세는 신화가 폭력적이고 음란하다면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주고 있는 모든 것이 폭력적이고 음란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작품에 담긴 표현수위는 우리사회가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폭력과 섹스일 뿐 질서 체제를 부정하고 파괴할 정도의 전복적인 상상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대표작가 이현세의 위치와도 결부되는 부분이다. 속된 말로 민망한 수준의 작품이라면 하지도 않고 할 이유도 없다는 주장이다. <천국의 신화>가 성인용이건 아동용이 별도로 있건, 성인용을 아동이 보건 간에 독자는 대한민국 대표 수준의 작품을 보는 것일 뿐 속된 포르노나 대사의 3할이 욕인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이 1인 창작물이 아닌 프로덕션 시스템에 의해 공동 창작되는 것이고 장르만화의 관습화된 구조를 비켜가지 못했다는 점에는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현세의 총지휘하에 역사소설가가 스크립트로 참여하고 시대극화를 그리는 것에 능한 그림 작업팀이 투입됐다. SF판타지와 전쟁시대극화, 신무협만화가 새로운 장르를 구축하며 유행하던 상황이다. 장르만화의 틀 안에서 <천국의 신화>를 본다면 그것은 전쟁판타지 또는 무협판타지 만화 정도로 읽힌다. 이 장르 만화의 특징은 설정 또는 표현의 확장이다. 작품이 회를 거듭하고 주인공이 새로운 사건과 만나면서 폭력 섹스 등의 묘사가 가장 최근의 것보다는 배로 과도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절대 강자가 되고 주인공보다 한 수준 높은 새로운 적의 등장으로 극은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앞서 장르화 된 만화의 구조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이 <천국의 신화>의 기존 논란과는 상관없이 만화장르 자체 또는 현대 장르만화가 지닌 이야기 체계 자체에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고 이는 갈수록 증폭되는 것이며 극을 이루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화의 폭력적 이야기 구조와 만화의 폭력성은 현대 만화장르가 지닌 관습이고 이는 중요한 수단이며 도구이다. 


만화 속의 신화, 시스템화 된 신화의 폭력성 


스토리텔러의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은 신화는 이야기 매체 중 하나인 만화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화 속의 시각화 된 이미지는 물론이고 원형적 이야기 구조는 어쩔 수 없는 만화의 틀이다. 또 전쟁영웅신화를 바탕으로 재해석된 영웅형 만화주인공의 신격화와 전쟁서사극을 바탕으로 분화 발전한 장르만화는 만화가 신화를 활용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장르만화의 출현과 변화 발전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관습성은 현대적 신화체계를 수립하며 신화의 두께를 넓혀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대량복제시대의 대중매체가 지니는 상업적 운명을 털어내기는 힘들 것 같다. 특히 신화가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상세 보고서로 읽힐 수도 있고 신화체계의 수용이 곧 근원적 폭력을 인정하고 폭력을 용인하는 한편 이를 학습 시킬 수도 있음은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할 대목이다. 

기본적으로 현대 대중매체는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상호작용 기능을 극대화 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만화의 경우는 고유한 특징 중 하나로 자기 동일시 효과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매체이고 동일 형식의 사건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즉 특정 사건이나 행위의 반복을 통해 익숙한 시각적 체험과 함께 극적 긴장의 고조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대중매체의 악기능으로서 학습효과와 깊게 연관된다. 대중매체의 학습효과에 대해서 다수의 연구보고가 부정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만 대중매체가 대리체험 또는 대리만족의 기능이 있다는 점에는 다수의 연구보고가 긍정적인 답변을 보여주고 있다. 

만화는 이처럼 주인공의 탈을 쓴 독자가 주인공의 갈등을 자신의 것처럼 해소하며 극적 긴장감을 얹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사회적 억압 또는 개인적 억압의 분출 욕구를 해소하는 등의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신화의 저변에 깔린 다양한 유형의 폭력을 장르만화가 서사구조 속에서 반복 재생산 하면서 폭력을 미화하는 등 악기능이 이어질 수도 있음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폭력 행위에 대한 반복적인 체험은 폭력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고 폭력 행위 자체의 도덕적 해이를 일반화 시킬 수도 있다. 신화가 다수의 논의를 통해 사실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특정집단에 의해 한때 사실로 간주되었던 이야기인 것처럼 만화 또는 만화 속의 폭력이 그렇게 잘 못 이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예장, 서울예술전문대학교, 200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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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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