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열왕대전기의 이정애, 만화규장각, 2002


이정애


이정애는 <열왕대전기><소델리니 교수의 사건수첩>등 우리 순정만화계에 다수의 걸작을 제출한 중견 작가이다. 철학적 사유가 듬뿍 담긴 문어체의 대사와 동성애 취향을 짙게 풍기는 파격적인 성의식, 굵은 선의 양감이 그로데스크 함을 더하는 작화법 등으로 소수의 열광적인 독자군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열광하는 소수의 독자층 만큼이나 그의 작품을 불온한 것으로 보는 시선 역시 집요해서 액운처럼 반복되는 작품의 부분 삭제 및 수정 요청(심의 기관 및 출판사 자체 심의)에 시달려야 했고, 작품 완결 이전에 연재를 중지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63년 생인 작가는 이화여대 재학 중 순정만화계의 대모격이었던 황미나의 문하생이 되어 만화계에 입문했다. 1986년 <헤르티아의 일곱 기둥>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한 이래 황미나의 여러 문하생 출신 작가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다. 80년대 후반 남성 중심의 만화 유통 및 소비구조 하에서 변종의 장르처럼 폄하됐던 순정만화 장르는 소녀의 연애심리를 바탕으로 안정적 소비시스템(최소 독자군)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유럽 궁정생활의 환상(궁정 시대가 되면서 지방 영주들은 권력을 얹기 위해 궁으로 몰려들었고 화려한 치장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했다. 왕비를 위해서는 죽음을 맹세했고, 공주의 사랑을 얹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또는 목숨을 건 사랑이라는 플롯이 살아있던 공간이 곳 궁정이다.)이 그대로 장르의 문법으로 남아있는 순정만화 장르가 발전을 가속화하면서 색다른 소재와 주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정애는 이 시기 우리 순정만화의 변화기를 견인한 대표작가이다.  


‘순정만화=소녀만화’라는 인식이 강하기도 하고 창작 소재에 대한 제한이 많았던 환경 탓도 있겠으나 성인 여성을 목표 독자로 설정하고 동성애 심리를 끌어들인 작가의 작품은 우리 만화계에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첫사랑(경험), 대학입시, 결혼, 출산이라는 통과의례에 대한 공포로 소녀 이후의 꿈을 결박 당하고 ‘만화읽기’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날 준비를 하던 이들에게 이정애가 쏘아 올린 작품은 진지한 의사소통을 위한 터전이었고 독자와 동지의 참여를 요구하는 지적 게임이었다. 그러나 그 게임은 2001년 12월 현재 작가의 절필 선언과 함께 중단되었다. 


이정애는 새롭다는 것, 다르다는 것 때문에 받아야 했던 심적 고통과 불운처럼 반복되는 연재 중단 사태를 더 이상 감내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인터넷 만화웹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코믹스투데이가 자금난에 빠지면서 연재고료가 미지급되는 등의 사태를 가져왔고 정상적인 화실 운영이 어려워지자 이정애는 프로작가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는 아마츄어 무대(동인만화)에서 이정애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겠다고 했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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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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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히는 이정애님 글보니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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