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병준
‘시와 산문은 달라서 산문은 80%가 글을 쓰겠다는 의지로 가능하다’고 어느 시인 출신 산문가는 고백한다. 20페이지 남짓한 단편만화와 20페이지 분량 씩이 더해져서 책 꼴을 만드는 장편연재만화를 둘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을까? 산문과 장편연재만화에 담긴 의지는 무엇이고, 시나 단편만화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는 노력해서 만들어 질 수 있는 수준의 것이라 한다. 시가 다르다는 것은 노력 따위로는 불가능해서 차라리 운명처럼 찾아 드는 성격 때문이라 한다.
이를 단편만화와 장편연재만화의 경우로 설명하면 이렇다. 장편연재만화는 작가의 열정과 출판사가 지닌 상품화의 의지로 80%는 만들어진다. 그러나 단편만화는 다르다. 그것은 작가적 의식을 지닌 이에게 불현듯 찾아 드는 것이고 답을 내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물음 같은 것이다.
변병준은 그런 작업에 시달려 온 만화작가이다. 인기 연재작 한편이면 10여년을 거뜬히 살아가는 만화계에서 불현듯 찾아 든 주제 한 꼭지를 몇 달을 묵혔다가 20페이지 단편에 담아 뿌려놓고 돌아서는 그런 작가이다.
1972년 생인 작가는 만화계의 재능있는 신진 작가들처럼 이십대 초반에 신인만화공모전을 통해 독자와 만났다. 군대 입대 전 대량의 단행본 만화작품을 생산했던 선배작가 조운학 화실에서 7개월간 ‘뒷처리(만화제작 시스템 중 지우개질, 먹칠 등을 하는 최하위직)’를 하며 입문했고, 1995년 가장 상업적인 색깔을 지녔던 ㈜대원의 성인만화잡지 [투웬티세븐] 신인만화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수상작인 <그 해 여름 날의 코미디>는 제목과 매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인 ‘섹스코미디’ 장르의 단편 만화.
대개의 데뷔작들이 그렇듯 작가수업을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신변잡기식 소재에 유머를 곁들인 것이었다. 만화엘리트 입문코스를 무사 통과한 신인만화가 변병준은 가장 대중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 출판사의 트레이닝을 받았다. 같은 잡지를 통해 발표된 이후의 작품들 역시 단편의 형식을 취했고 성인용 잡지에 수록되는 성적인 유머 페이지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훈련됐다.
온갖 엉뚱한 생각들로 가득한 육체의 판매원 생활. 성인용 섹스코미디 장르의 만화작가가 독자에게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다. 다수의 작가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주류의 만화문법에 편승하고 이것이 단숨에 체화 된 냥 의젓한 척, 신념을 지닌 판매원인척 할 때 변병준은 딱 한 발자국씩 만 주류에 접근해왔다. 그리고 이내 그는 만화가에 부여된 엉뚱한 하루의 고백을 ‘일상’이라는 무게로 이끌어낸다. 고급만화에 대한 욕구가 넘쳐 설정 된 리얼리즘 만화의 계보 속에 넉넉하게 진입하며 단편만화의 색다른 미학을 채점 받고자 한 것이다.
1997년 동아엘지 만화공모전에서 장려상 을 수상한 단편 <어느 섬마을 이야기>를 거쳐 1998년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출판 부분 신인상을 수상한 첫번째 단편 모음집 <<첫사랑>>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배수아의 단편소설 <프린세스 안나>를 의식의 흐름을 쫓다가 숨통이 막힐 것만 같게 조작해내는데 성공하기 까지. 이미 알려져 있는 만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가지 않고 주변부에서 원심 운동을 지속하며 자신의 만화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걷어 올렸다. 일부러 작품을 쫓아가지 않고 다가오는 작품을 안은 것이다.
지금 그는 그 무대를 우리만화계가 아닌 일본으로 옮겼다. 알려진 이름 석자 위에 안주하지 않고 그 이름을 모른척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다시금 평범한 만화가 지망생의 하루를 보내며 작품이 운명 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규장각, 부천만화정보센터, 200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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