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미우츠 스즈에의 <유리가면>

끝나지 않는 작품, 떠나지 않는 독자 

-미우츠 스즈에의 <유리가면>-  


한 작품, 한 작가만의 월간 만화잡지


지난 5월 20일 일본의 유명 출판사 하쿠센샤가 한 소녀만화 잡지의 휴간 소식을 발표했다. 제14호로 휴간을 선언 한 이 잡지는 타이틀부터 컨셉까지가 퍽 우습다.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외형이지만 광고와 인터뷰 기사 한 꼭지를 제외하면 딱 한 작품이 수록됐다. 14호 뿐만이 아니라 1호부터 휴간호까지 딱 한 명의 작가 딱 한편의 작품을 꽉꽉 눌러 담아뒀다. 이게 무슨 만화잡지인가 싶지만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면 몇몇 이들은 고개를 끄덕일지도...

답부터 말하자면 수록 작품은 <유리가면>이고 인터뷰 기사의 주인공은 이 작품의 작가 미우치 스즈에이다. 잡지의 타이틀도 <월간 유리가면>. 왠만하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인기작이고 세계만화사에 기록될만한 걸작인 탓에 개인형 만화잡지(?)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한때 국내에도 순정만화잡지 붐이 일면서 K작가가 자신의 필명과 같은 화실에 있는 문하생들만의 작품으로 잡지를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잡지는 10여 편에 이르는 다른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월간 유리가면>처럼 오직 한 작품만을 수록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만화잡지가 아니라 일반적인 잡지의 개념대로라면 걸작만화 <유리가면>에 대한 각종 상품 정보와 관련인 인터뷰, 리뷰나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과 거리가 먼 이 잡지는 그 옛날의 걸작만화 <유리가면>을 3권 분량씩 묶어서 14개월간이나 발행해왔다. 휴간을 선언한 이유는 더 이상 싫을 <유리가면>이 없기 때문이고 폐간이 아닌 이유는 아직 이 작품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결편을 보긴 본 것 같은데 


<유리가면>은 소름 돋는 스토리 전개와 동공없는 눈 표현으로 인기를 끌고 있던 공포 만화가 미우치 스즈에가 데뷔 9년 만인 1976년 소녀만화잡지 [하나또 유메]에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다. 1회 연재 후 2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열독자들 사이에 화재가 되고 있으며 새로운 독자층을 확대해가고 있다. 햐쿠센샤가 이 터무니없는 개인형 만화잡지를 발행한 것도 어쨌든 팔리기 때문. <월간 유리가면>은 <유리가면>의 5천만 권 판매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기도 했다. 

말이 많은 만큼 탈도 많았던 이 작품은 26년간 수 차례에 걸쳐 연재중단을 반복하며 독자와 편집부의 애를 태웠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작가의 게으름. 작품 자체에 대한 열정이나 애착과는 상관없이 터무니없이 느린 작업 속도가 작품만큼이나 대중의 관심거리가 됐다. 여러 가지 제목의 해적판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인기를 끌었던 이 작품은 지금도 완결편을 봤다는 독자와 나오지도 않은 완결편을 어떻게 보냐는 독자로 나뉜다. 이 경우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만화 <유리가면>의 인기에 힘입어 소설, 연극, TV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의 동명 창작물이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여럿 나왔고 이 작품들은 저마다 완결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해적판 출판업자들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작품을 말 칸 몇 개 바꾸어 출판하는 것으로 완결 지어버린 경우도 있다. 완결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표지에 박힌 책을 본 독자들은 이미 끝을 본 꼴. 


무책임한 만화가, 사랑 받는 만화 작품


<유리가면>은 1997년 [하나또 유메]에 351회 분 연재를 마지막으로 다음 이야기를 중단했다. 일반적으로 코믹스판 만화책 단행본은 약 8회 연재 분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계산상으로는 늦어도 1998년에는 43권이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미우치 스즈에는 단행본 출간 시 에 잡지 연재 분 원고를 대폭 수정하기로도 유명하다. 180여 페이지 분량의 코믹스판 단행본이 연재 후 5년여가 지나서야 42권이 발매됐다. 연재분량을 묶어서 출판하는 단행본의 경우 담당 편집자가 다음 권이 출간되는 시기를 모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작가의 담당 편집자는 다음 회 잡지 연재가 아닌 다음 권 출간 시기도 작가만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때 주인공과 같은 또래였던 독자들이 30대 중후반이 됐지만 작품 속 무대는  겨우 4~6년이 흘렀다. 늙지 않는 주인공들을 보며 작가의 게으름을 지탄해 볼 일이다. 


한권 분량 해적판, 두권 분량 문고판, 세권 분량 애장판


몇 년 전 도서출판 대원에서 두 권 분량을 1권으로 묶은 정식 한국어판을 발행했다. 문고판 <유리가면>이 그 것. 끝을 본 줄 알았던 해적판 독자들이 들 끊기 시작했고 새로운 판형과 세련된 표지 일러스트가 한 몫을 해 소장가치 높은 도서로 꼽혔다. 그러나 이 책은 22권을 마지막으로 절판됐다. 대원씨아이로 이름을 바꾼 출판사에서 세권 분량을 묶은 애장판을 다시 내기로 한 것. 독자들의 혼란은 한번 더 되풀이 됐지만 여전히 작품은 끝나지 않았다. 매월 한 권씩 내기로 한 한국어 애장판 역시 14개월 이후에는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1997년 이후 다음 원고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 최근 작가가 일본에서 작품 연재를 재개하고 있어서 <유리가면>의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치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작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유리가면>이 아닌 또 다른 중도 하차작품인 <아마테라스>이다. 50권으로 끝내겠다는 작가의 언급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 상황으로 봐서는 50권이 언제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을뿐더러 작가의 말을 신뢰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순정만화와는 다른, 순정만화 같은


<유리가면>은 천부적 재능과 상대적 열정을 동시에 지닌 두 명의 여자 연극배우가 펼치는 에스컬레이터 게임이다. 스포츠 시합처럼 연습과 실전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재능 대 열정에서 열정 대 재능으로 캐릭터를 바꾸면서 또 한판 대결을 펼친다. 순정만화의 화풍과 장르적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사구조만으로도 이 작품은 구습적인 순정만화의 울타리 속에 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타령에서 일찌감치 탈출해있다. 

보 잘 것 없이 가난하기만 한 주인공 마야와 없는 것 없이 모든 것을 지닌 아유미. 마야는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 연극을 통해 신델레라의 꿈을 꾸지만 작가는 이를 이야기의 한 설정으로만 간주할 뿐이다. 마야와 아유미는 소년만화의 열혈 주인공, 가령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오혜성과 마동탁 처럼 그려진다. 가진 것이 없어서 열정을 사르고 재능 앞에 무기력한 열정에 패배감을 느낀다. 재능이 있지만 열정의 상대가 두렵고 열정을 지니기 위해 재능을 단련시킨다. 그러기를 몇 차례 연인과 조력자는 근성을 일깨운다. 꿈 도전 승리를 테마로 두고 있는 소년만화의 전형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유리가면>은 물방울 눈동자와 굵은 웨이브의 블론드 머리, 유럽풍 드레스와 궁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테마로 한 전통의 소녀만화(순정만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극 경연을 주제로 하고 유명 희곡의 연출과 연기를 에피소드로 하는 만큼 깊은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은 90년대 말부터 인기를 누렸던 요리만화 등 전문소재만화의 전형으로 보기에 전혀 부담감이 없다. 실제로 국내 여성 연극배우들 중 상당수가 <유리가면>과의 만남을 연극 입문의 첫 과정으로 꼽고 있을 정도이다. 또한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중간중간 섬뜩한 기운을 불러오는 공포만화의 표현법이라든가 개그 컷의 활용 등 현대 장르만화의 많은 코드가 이 작품 하나에 베어있다. 물론 순정만화의 영원한 테마인 원조교제급 키다리 아저씨와의 사랑도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50년 스토리만화 역사의 걸작 중 걸작이며 완결편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유리가면>은 유별나게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인이 뽑은 최고의 작품 중 한 편이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고 영미권에서도 일본만화의 진가와 중독성을 설파하고 있으니 세계인이 일독하고 있는 셈이다. 아쉬운 대목은 역시 언제 끝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 다시 한번 놀라운 점은 그러기를 수 십 년인데도 여전히 독자들이 포기하지 않는 마력과도 같은 작품의 매력이다. (끝)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만화컬렉터를 위한 TIP 1. 

최근 대원씨아이에서 나온 애장판 <유리가면>은 매달 1권씩 나올 예정이다. 535p에 달하는 두께만큼이나 높은 소장가치를 지녔다. 책꽂이에 꽂히면 빛이 날 만화책 중 한편임에 분명하다. 절판 된 문고판 <유리가면> 역시 아직 서점에서 전량 회수되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구하기 힘든 도서이니 만큼 눈에 띄는 즉시 접수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만화컬렉터를 위한 TIP 2. 

<유리가면>에 견줄만한 순정만화의 걸작으로는 최근 하이북스에서 복간된 <캔디캔디>와 대원씨아이에서 복간된 <베르사이유의 장미> 정도가 있다. 또 너무너무 오래 연재중인 작품으로는 1969년 연재를 시작해 최장수 기록을 갱신 중에 있는 <고르고13>이 아선미디어에서 나오고 있고, <유리가면>과 같은 해 연재를 시작했지만 130여 권이 발행되어 최다권 기록을 갱신 중에 있는 <여기는 잘 나가는 파출소>가 서울문화사에서 나왔다. 아쉬운 점은 2001년 20권 이후 소식이 없다는 점. 국내 작품으로는 <소년챔프>의 <검정고무신>이 최장기 연재 기록을 갱신 중에 있다. 


만화컬렉터를 위한 TIP3. 

<유리가면> 처럼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연재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여 끝을 언제 볼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국내 작품도 여럿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진의 <푸른포에닉스> <바람의 나라>, 김혜린의 <불의 검>, 이정애의 <열왕대전기> 등이다. 최근 장기 연재만화 중 한편 인 서문다미의 SF순정만화 <END>가 연재 중단을 선언했다. <바람의 나라>나 <불의 검>처럼 잡지 연재가 아닌 단행본으로만 출판하겠다고 선언한 것. 독자 입장에서는 다음 편을 기다리기 위해 미리 큰맘을 먹어야 할 판이다. 중도하차가 많지 않은 남자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작품. 최근 스포츠 신문 연재 계획을 발표하면서 다음 편에 계속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만화컬렉터를 위한 TIP4. 

<유리가면>의 작가 미유치 스즈에가 가장 열의를 보이고 있는 사회활동은 만화가가 아니라 교주라고 한다. 외계 생명체를 믿는 신흥종교 집단의 수장이라는 것. 일본인들이 워낙에 다양한 신을 섬긴다고 하니까 그런 쪽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일본 만화가 중 이처럼 작은 교파의 교주가 여럿 있다고도 한다. 학산문화사에서 나오고 있는 우라사미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는 만화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여럿 나오는데 주인공들이 싸우는 상대가 ‘친구’라는 신흥 종교 집단이다. 이런 분위기일까?


* 작가에 대하여

미우츠 스즈에

1951년 일본 니시노미야 태생

       오사카에서 자람  

1967년 고교생 신분으로 슈에이샤의 순정만화잡지 <별책 마가렛트>에 

       <산의 달과 아기 너구리>를 공모하여 금상 수상

       데뷔 이후 공포만화 등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림

1976년 하꾸센샤의 순정만화잡지 <하나또 유메>에 <유리가면> 연재 시작

       연재중단을 반복, 97년 연재 중단, 현재까지 미완결

1982년 고단샤 만화상 수상

1986년 가도가와 슈덴에 <아마테라스> 연재 시작

       연재중단을 반복, 최근 연재 재개   

1995년 일본 만화가협회상 수상

2002년 코믹스판 3권 분량을 묶은 <월간 유리가면> 제 14호로 휴간

       대원씨아이에서 한국어 문고판에 이은 애장판 발행

       3권 분량을 묶은 애장판 6월부터 매월 1권씩 발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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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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