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코믹존은 기획특집란을 통해 ‘만화탐구생활’이라는 부제로 ‘장르만화’에 대한 깊숙한 탐구를 시작한다. 현대만화의 상업적인 시스템 하에서 그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장르만화는 상업 출판물의 생산자들인 만화가들을 ‘반복재생산’에 능한 장인에서 시스템의 한계를 넘어 새로움을 모색하는 작가들로 전환시키고 있고 나름의 장르 문법을 구축해가고 있다. 이에 코믹존은 현대만화의 새로운 관습에 대한 만화평론가 박석환씨의 탐구를 지켜보기로 했다. - 편집자 주
1. 장르만화란
장르, 관습적인 비속함
일반적으로 장르(genre)라 함은 ‘생물학상 용어로 종(種) 다음에 오는 속(屬)을 뜻하고 문학?예술 분야에서는 부문?양식?형(型)을 뜻한다’. 각 분야별로 1차적인 갈래 기준이 정형화되어 적용되고 있다면 2차적인 갈래 기준의 생산은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문학의 경우 시, 희곡, 소설, 평론을 1차적인 구분점으로 두고 더 나아가 정형시, 자유시, 소네트 등으로 세분할 때 장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회화에서는 비교적 작은 캔버스에 일상적이고 평범한 제재를 그린 풍경화를 비하하는 의미로 장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최근 본격화되고 있는 무협소설, 환타지소설, 추리소설 등의 대중소설을 장르문학이라 칭하고 있다.
만화에서는 ‘한 무리로 묶을 수 있는 공통성’을 지닌 작품군이나 ‘이미 구축된 선례’를 따르는 작품을 칭할 때 장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학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동성간의 우정, 이성과의 사랑과 삼각관계, 부모님이나 선생님과의 갈등과 이해 등의 사건이나 감정 상태를 소재로 한 작품군을 ‘학원장르만화’라 하고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닌 임재원의 <짱> 같은 작품을 ‘학원만화’라 한다.
순문학과 격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장르문학의 개념이 일반화되고 있는 문학의 경우처럼 만화의 경우에서도 관습적인 수법을 상업적인 전략으로 유지하고 있는 장르만화를 비속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허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작업하는 감독들이 작가라는 지위를 얻는 것과 같이 고집스런 장르만화의 장인들은 만화작가의 칭호를 받고 있다.
장르, 내용을 모색하는 형식
초기 형태의 만화는 대상의 성격을 과장하거나 생략한 회화적 수법에 언어를 접합시켜 지시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이라는 형태의 미디어에 대한 활용방식의 변화와 발달, 이를 인지하는 대중의 습성에 대한 고찰과 적용 등은 문화예술, 문화산업으로서의 만화 장르를 성장시켰다. 이 성장의 결과물은 장르만화라는 독특한 계보와 관습을 구축했고 대량생산과 소비가 가능한 창작상품이 됐다.
작가, 출판, 배급 및 유통업체, 최종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생산과 소비를 전담하는 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분되는 갈래는 일반적으로 극화라 불리는 스토리만화(코믹스, 망가)를 중심으로 생성?발전?쇠퇴를 반복한다. 대중의 기호와 소비 양상, 익숙한 기호들의 집합으로 이뤄지는 장르만화는 익숙한 회화적 느낌과 캐릭터, 줄거리와 소재, 이야기 구조와 전달 양식 등을 통해 ‘안전한 소비 욕구’를 지닌 독자를 유인하고 상업적 성공을 담보한다. 만화 내부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존재양식을 지닌 키워드 중 하나인 장르만화는 대중이 만화를 읽고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자유롭듯 각 범주의 설정과 확대가 자유롭게 이뤄진다.
책이라는 기준에 입각해서는 발매 주기, 제작 방식, 판형, 유통망, 소비장소 등에 따라 나뉘기도 하고, 만화 장르라는 측면에서는 카툰, 캐리커쳐, 코믹스트립, 코믹북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회화적 수법에 따라서는 극화체, 명랑체, 순정체 등으로 나뉘기도 하고, 작품의 내외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상업만화, 비주류만화 또는 작가주의만화 등으로도 나뉜다. 또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이 삽입되는 문화상품의 특성상 국가적 분류 기준이 적용되기도 하고 작품의 주 독자층의 연령대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르의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것은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 시공간, 주인공의 직업이나 역할 등 서술적 구조에 따른 ‘내용상의 분류’이다. 이는 만화창작의 전통적인 방법론이나 계보 속에서 구축되는 스타일, 소재 상에서의 관습적인 특징들의 집합으로 구체화된다. 관습적 창작 행위에 대한 비하와 장르의 구성 원칙을 조소하는 표현인 ‘장르의 법칙’은 이미 구축된 선례를 선택적으로 취하는 것 일뿐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동일한 형식의 변주를 거듭했던 허리우드 서부영화를 두고 ‘내용을 모색하는 형식’이라 표하듯 재발견을 위한 형식과 소재의 선택 및 생산이 곧 ‘장르’의 존재 이유가 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동일한 범주에서 동일한 의미로 해석되는 상징이나 이야기는 특정 문화권에서 선호하는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장르만화 역시 대중에게 이미 알려진 이야기, 혹은 특정한 이야기의 형식을 이용하여 원형적인 이야기가 지닌 일반적인 범주의 평이성을 뛰어넘고 독자에게 새로운 긴장감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선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장르만화의 작가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 있는 고대의 신화?동화?민담에 등장하는 원형적인 이야기나 현대의 서사장르가 구축시킨 새로운 신화와 상징들을 차용하여 ‘한 문명의 공통적인 이상과 열망을 구체화’한다.
이처럼 장르만화는 한 시대의 공통적인 이상과 열망을 만화적 수법으로 구체화시켜 대량 생산한 머그잔이다. 그 잔은 때로 비어있을 수 있고, 차고 넘칠 수도 있다. 잔의 내용물은 작가가 의도하여 담아두는 경우도 있고 사용자(독자)가 그 외형을 보고 쓸모를 인정(감동)하여 스스로 담아내는 경우도 있다.
2. 장르만화의 출발과 현재의 지점
만화의 원형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심층심리학에서 ‘원형(archetype)’이란 용어를 ‘원초적 심상(primordial images)에 적용시켰는데, 이는 옛 선조들의 생활에서 반복되던 경험 형태들의 심리적 잔존물로서, 인류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을 통하여 전해 내려오고, 문학작품을 비롯하여 신화?종교?꿈 그리고 개인적 환상에도 표현된다고 보았다.’
‘문학비평에서 ‘원형’은 신화와 꿈, 심지어는 사회적 행동인 제의양식에서뿐만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문학작품 속에서도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서술구조, 인물유형, 또는 심상(이미지)에 적용된다. 이처럼 다양한 현상들에 내재해 있는 유사성들은 일련의 보편적이고 원시적이며 근원적인 구조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장르만화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서는 만화장르의 시작부터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논고들이 이왕에 많이 나와 있는 관계로 여기서는 상기한 ‘원형’에 입각해서 간략하게 검토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만화에 있어서 ‘원초적 심상’과 ‘다양한 현상들에 내재해 있는 유사성’이라 하면 미술의 전통으로부터 추출된 회화 형식과 이를 관상자(觀賞者)에게 직관시키고자 하는 예술적 행동양식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방법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만화장르의 원형적 모형을 간직하고 있는 캐리커쳐와 카툰에서처럼 단순, 경묘, 희화성과 과장성이라는 사전적 개념의 특성이 만화의 형식적 원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현대만화의 출현을 인쇄술의 발달과 영상 기술의 발견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장대한 서술구조를 지닌 만화책만화(comics, Bande Dessinee, 漫畵manga)의 원형과 만날 수 있다. 캐리커쳐로부터 시작된 회화적 형식의 원형적 요소가 인쇄미디어(신문, 잡지, 책)와 영상미디어(사진, 영화)와 만나고 이로부터 체험된 심리적 잔존물에 대한 유사 표현 욕구가 구체화되면서 만화책만화로 대표되는 현대만화의 골격이 구축된다.
만화적 형식으로 서술구조를 지닌 독립적인 출판물. 이른바 ‘출판영화’라고도 불리는 만화책만화는 사물의 움직임을 필름에 담을 수 있게 되고 이를 프레임 단위로 지각할 수 있게 되면서 경험하게 된 일련의 시각적 지각형식을 한 장의 종이에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배치한다. 회화의 출발점과 만화의 출현이 동일하듯 현대만화의 출발은 영화의 출현과 동일하다.
장르만화의 전개
귀족들의 인물화 그려주기에 지친 유럽의 화가들이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제시한 것이 캐리커쳐라는 주장이 있듯 만화는 형태의 과장과 희화화로부터 풍자성을 이끌어 내고 ‘신문시사만화’라는 장르만화의 출현을 불렀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유명인들에 대한 촌평을 통해 신문의 논조와 작가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정형화된 정치만화는 1칸 형식으로 고착화됐고, 일상사를 통해 시사 현안에 비판적 접근을 시도하는 형식의 생활만화?4칸으로 짤막한 이야기를 담는 구조를 취한다.
정치적 입장의 구체화가 시사만화를 불렀다면 시사만화의 발전은 정치적 입장의 대 국민 이해와 이념 주입을 통해 냉전시대의 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아동용 ‘전쟁만화’를 도출시킨다. 전쟁을 소재로 하는 문예물은 영웅서사를 그리고 영웅의 모험과 사랑, 가족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같은 1차원적인 주제 설정의 방향성은 소재주의적인 창작을 유도했고 이에 대한 관습화는 장르만화의 도입을 예고한다.
문예물의 창작이 주제나 소재의 전달에 집중하면서 각각의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전달 기호들을 일반화시키고 새로운 주제의 접근과 소재의 도출과정에서 앞선 장르의 개념적인 요소들을 적용하고 있다.
신문만화의 한 유형으로 제시된 4칸 생활만화는 가족 중심의 명랑물을 도출시킨다. 명랑만화의 즉시적인 전달력은 말초성을 자극하는 성애만화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만화를 구축하고 교양만화와 전문소재만화의 동인이 된다. 모험, 사랑, 우정으로 대표되는 아동 대상의 만화는 대상층을 높여가면서 학원과 공상과학만화를 두축으로 스포츠, 액션과 시대, 무협, 환타지 장르를 출현시켰다. 소년만화의 변종 화풍 중 하나로 기록되던 순정만화는 사랑을 중심으로 가족(근원), 학원(성장), 우정(관계)이라는 테마의 변주를 통해 가장 독특한 장르만화 중 하나로 구축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코믹존, 코믹플러스닷컴, 2001-06-3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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