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의 집합체
1960년대는 한국만화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전쟁에 대한 참혹한 기억과 휴전이라는 전쟁 재발 요인이 주는 공포감은 단순 선화 방식의 명랑체가 다스리지 못하는 현실을 삽화체 형식으로 전환 시켰고 대중의 고난을 어루만지는 눈물의 작가 김종래와 전쟁의 불안감은 비할 바가 없을 정도로 공포스런 괴담 전문 작가 박기당을 출현시켰다. 김종래의 작품 중 한 축이 아동 모험소설 류의 작품이라면 박기당의 작품은 공포영화 류의 작품이었다. 한국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모험소설과 공포영화가 공히 그 하위 장르로 공상과학 분야를 취하고 있음은 장르의 생성과 변천에는 ‘대부분의 다양한 문화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패턴 또는 원형적 싸이클’이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준다.
SF(science fiction) 장르만화는 모험소설, 고딕소설의 이야기 구조와 공포영화, SF영화의 화면연출 방식 등 서로 다른 장르의 관습적 요인(컨벤션, convention)들이 혼합 된 양상을 보인다. 초기 형태의 한국 SF만화의 전형을 구사하고 있는 방학기의 『타임머신』이 시간여행이라는 모험성을 근저에 두고 있다면 김산호의 『라이파이』는 현대 과학문명이 불러오는 신세계에 대한 모험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전쟁 도발 세력의 대리물로 간주되는 외계 생명체의 침략에 의한 공포감에 집중한다. 미국식 슈퍼영웅물로 분류될 법한 『라이파이』는 상반되는 이념에 따른 냉전시기의 대립에 집중하면서 근현대 SF만화가 일궈가고 있는 ‘시대성에 대한 은유와 통찰’을 포착한다.
산업화 사회, 이후의 공포
산업화사회는 기계로 대표되는 과학문명의 발달을 통해 소수의 희망과 다수의 불안을 가져왔다. 희망은 인간 이상의 노동력을 지닌 로봇이었고, 불안은 로봇을 능가하는 초능력 인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희망은 우주 왕복선을 통한 지구 밖 미지의 세계 정복이었고, 불안은 외계 생명체의 반발과 역침략이었다.
SF만화는 이 희망과 불안을 컨셉으로 과거의 이야기 구조에 새 옷을 입혔다. 『철완아톰』은 인간의 낭만(아들 부재)을 위해 태어났고, 『기계전사건담』은 인간의 휴식(전쟁 참가)을 위해 태어났다. 『사이보그009』는 그 산물들과 대립하는 초능력 인류로 태어났고, 『마징가 Z』는 오컬트적 신비주위와 결합된 기계문명의 이기심에 의해, 『우주전함 야마토』는 미지의 세계 정복에 대한 반발에 의해, 『그랜다이저』는 그들의 역침략에 의해 태어났다.
산업화사회의 급속 진입과 인류문명의 눈부신 발전이 구축해낸 SF장르만화는 시대에 대한 은유와 한 발짝 앞선 통찰로 아무도 진입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그러나 SF장르만화가 예견한 산업화사회의 유토피아적 환상과 디스토피아적 불안은 정보화시대, 디지털시대의 도래와 함께 그릇된 묵시록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SF장르만화의 존재는 우리 곁을 부유하고 있으며 그 희망과 불안의 카타르시스는 묵직한 작품성과 함께 만화장르의 도전을 부추기고 있다.
익숙화된 산업화사회의 태엽식 사고(어떤 방식으로 든 힘을 실어줘야,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는 디지털화를 통한 리모콘식 사고 체계로 전환됐다. 거대한 태엽의 위용에 주저앉았던 인류는 이젠 그 원리가 궁금하지도 않은 버튼 누르기의 묘미에 빠져서 모험과 공포와는 별개의 신화를 구축하고 있다. 모험과 정복, 대립과 승리의 저편에서 SF장르만화는 고착화됐고 새로운 장르 요인의 결합은 이 장르의 진화를 요청하고 있다.
희망의 변주
근현대 SF장르만화의 진화는 다른 장르만화의 속성이 유입되는 형식을 취한다. 로봇(우주선)->초능력자->사이보그->외계인으로 이어지던 캐릭터는 외계인의 범위를 확대시켜 환타지장르 요인을 가미한 신․마귀를 포함하게 됐고, 조정형으로 인간을 해하지 않는 방식이었던 로봇은 로봇의 훼손이 곧 조정자의 상처가 되는 식으로 격투장르의 요인을 삽입하고 있다. 전 장르에 걸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연애장르와는 별개로 미소년․소녀물의 관습이 적용되는가하면 컴퓨터게임의 컨셉을 수용하면서 쇼팅 게임형이었던 우주함대물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형으로 바꾸는가하면 우주에서의 일상을 소재로 한 우주전문소재 만화도 등장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절대 팔리지 않는 장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SF장르만화의 한국형 모델은 러브로망, 코믹, 환타지, 학원, 액션, 시대 등과의 조우로 제출되고 있으나 실험적 소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산업과의 어깨동무가 한국출판만화산업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SF장르만화에 대한 산업적 평가는 ‘공들이지 않은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parkseokhwan.com )
한국만화문화연구원, 만화가이드2002, 시공사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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