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바람의전학생 성진, 씨네버스, 2001.07.24


캐릭터버스 8.


독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캐릭터 


이야기에는 항상 인물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주인이 되는 인물. 주인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주변의 것으로, 저만치 존재하는 세상의 것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야기를 접하는 이들은 그 주인공의 개인사 속으로 조금씩 빠져든다. ‘내 삶의 주인공’인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에 두터운 관심, 괜찮은 신뢰, 강력한 애착을 내비치며 ‘자기 동일시’의 최면에 빠져든다. 별도의 세상은 내가 관계하는 세상이 되고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된다. 현대 스토리만화는 이를 가장 치밀한 수법으로 이용한다. 만화잡지를 기반으로 장대한 스토리를 이슈에 따라 조각조각 나누어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다음 편에 계속’이라는 관습적 최면을 건다. 캐릭터는 독자의 욕망을 닮을 수 있는 욕망을 지니길 원하고, 만화의 이야기는 캐릭터 속으로 진입한 독자의 욕망에 따라 전개된다.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될 것이 뻔하다’는 자기 판단에 확신을 가질 정도로 캐릭터에 빠져드는 독자의 욕망. 


낯선 곳으로부터 등장하는 캐릭터 


이야기를 다루는 창작자들의 고민 중 하나는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의 등장을 어떻게 ‘설정 할 까?’에 있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뼈대(시놉시스 또는 구조)를 설정하고도 그 설정 속으로 어떻게 인물을 등장시켜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 때 이야기가 끄집어내는 전통적인 수법은 ‘어느 외딴 곳으로부터 홀연히 등장한’ 일반인(배경 속의)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누구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타의에 의해 규정된 정해진 그룹(학교, 학년, 반)과 자의로 선택한 그룹(친구-목적, 취미, 욕구가 같은)이라는 관습적 컨셉을 지닌 ‘학원만화’에서는 ‘홀연히 등장한 주인공’ 이미지를 ‘전학’이라는 훌륭한 장치로 해결하곤 한다. 


초・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고등학교에서는 새로운 사람의 등장이 쉽지 않다. 전근 오는 선생님의 등장은 잦은 일이지만 1학년 입학식이 아니라면 학업 과정 중에 전학을 오는 경우는 드물다. 일상을 뚫고 칠판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첫인사를 하는 등장인물.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교단을 내려와 새로운 그룹 속으로 진입하면서부터 이 인물은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질문 공세와 경계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눈이 띄도록 어여쁜 상대를 만났다면 ‘학원로멘스’가 펼쳐지고 새로운 목적이나 열정의 대상을 만났다면 ‘학원드라마’가, 건들먹거리는 등치를 만났다면 ‘학원액션’이 펼쳐진다. 물론 이 모든 장르의 관습보다 우선하는 것은 주변인물들의 답변을 교묘히 피해 가는 의문의 ‘주인공 만들기’이다. 


바람처럼 움직이는 주인공, 두 가지 모습의 얼굴 


<바람의 전학생>은 드러내놓고 학원만화의 전형임을 알리는 제목처럼 장르의 관습을 철저히 따르는 학원액션만화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무지막지해지는 폭력의 과잉이 경쾌함보다는 잔인함을 보여주지만 하나둘 풀어헤쳐지는 주인공의 비밀스런 배경과 프로야구 리그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 놀이를 축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주인공 성진은 대규모 폭력 조직의 후계자 훈련을 받은 보스의 아들이다. 고교급 파이터들과는 급이 다른 싸움꾼으로 영화배우 최민수 쯤 되는 저음과 어깨 힘 주기, 슈퍼맨급 정의감과 도덕심을 장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단 한판 붙고 보자’, ‘날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는다’는 투의 도발과 ‘이 사건은 내가 해결한다’는 식의 영웅심리로 세상의 온갖 고민을 몸으로 때워보려는 스타일이다. 주인공 성진의 다소 낯뜨거운 캐릭터성은 과잉된 욕구의 매개로서 한번쯤 일상 저편의 세상을 책임져보고 싶은 일반 독자의 욕망과 맞물린다. 

<바람의 전학생>을 그저 그런 장르만화에서 탈피하게 만드는 요소가 주인공의 조력자 선우 다미의 존재이다. 다미는 다중인격장애를 지닌 인물로 명랑한 미소년 캐릭터와 잔악한 파이터의 캐릭터 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평소에는 정직한 청년에 불과한 사람이 두들겨 맞으면 괴력의 소유자가 된다는 ‘녹색 근육맨 헐크’의 이야기성이 다미에게 주어졌다. 그저 준급 이상의 싸움꾼 다미가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 어떤 실전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괴력을 발산한다. 다미는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의 등장에 고통을 느끼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들 곁을 떠나기에 바쁘다. 아직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파이터, 친한 친구를 곁에 둔 적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 성진과 다미는 배치된다. 성진의 조력자로 등장해서 자신의 이야기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다미. 독자가 성진과의 자기동일시를 이루고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면 이야기 속의 성진은 다미의 다중 인격성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싸움에서 패배할 수도 있고, 다미와의 우정이 깊어져서 친구의 소중함을 느끼는 감성도 갖게 될 것이다. 자기 안에 자리한 분명한 감성의 소리가 다미의 고통을 느끼게 할 것이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욕망이 결국 자기를 해 할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인지 성진의 어깨는 갈수록 무거워 보인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씨네버스/ 2001-07-2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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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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