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만화잡지 창간러시
99년 겨울.
‘한다 한다’하면서 관계자들의 진을 빼던 시공사(주간 소년만화지 ‘쎈’)가 앞뒤가리지 않고 진격해온 삼양출판사(격주간 청소년만화지 ‘엔진’)와 한배를 탔고, 대본소용 일일만화 출간으로 잔뼈가 굵은 대명종(격주간 소년만화지 ‘팬티’)까지 합세, 때아닌 ‘만화잡지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됐다. 이들 출판사는 각각 5종 이상의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서울문화사와 대원출판사라는 두 메이저 만화그룹을 겨냥, 잡지창간을 통해 ‘新 만화계 삼각구도’를 꿈꿨을 법하다. 그러나 3종의 만화잡지들이 동시에 창간되면서 꿈은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두 메이저 출판사의 독립리그를 만들어주고, 자신들만의 마이너리그를 꾸린 꼴이 됐다.
2000년 5월 이들 잡지출판사는 일제히 첫 번째 단행본을 발표한다. 때아닌 신작 단행본 풍년이다. 먼저 대명종이 ‘팬티코믹스’ 시리즈로 김성모, 장태관, 이재석 등의 작품을, 삼양출판사가 ‘엔진코믹스’ 시리즈로 전세훈, 이태호 등의 작품을, 시공사가 ‘쎈코믹스’ 시리즈로 이충호, 박산하, 김진 등의 작품을 내놨다. 여기에 기존의 출판형식이 아닌 온라인잡지를 창간, 논외로 취급되던 아선미디어(주간 청소년만화웹진 ‘코코믹스’)도 김지원 등의 연재작품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중 새로운 잡지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네 명의 작가를 통해 각 잡지의 속내를 헤아려 본다.
2000년, 그 잡지의 단행본들
이재석/ 용광로/ 대명종/ 2000. 4/ 1권
무협(코믹)/ 단행본/ 청소년
★★1/2
잡지 창간은 막차를 탔던 ‘팬티’가 단행본 쪽에선 제일 먼저 출발한다. ‘일주일마다 갈아입는 팬티’라는 요상한 카피로 독자몰이에 나선 대명종. 카피보다 끔찍한 기획작품들을 가득 담아냈다. 편집자들의 작전과 기획에 충실한 코믹스판 B급 작가들.
재발이 이재석도 자신의 작품코드로 기억되는 ‘황당한 설정의 코믹’성을 강화하기 위해 사실성이 배가된 그림체로 나섰다. 온라인 만화웹진 ‘comicall'에서 ‘청량리만화’를 표방하며 연재 중인 작품의 그 화풍 그대로이다.
새롭게 시도하는 작품 <용광로>의 코드명은 ‘테크노 무협 시트콤’. 허나 이재석 표 패러디만화의 곱살스런 울림은 간데 없고 살냄새를 쫓는 성적 코드만 남발된다. 테크노도, 무협도, 시트콤도 무국적의 코드들을 하나로 묶어내던 이재석의 재주를 강조하진 못한다. 새로운 칼날이었으나 그전의 칼이 그리워지는 형국이다. 동급의 김진태가 스포츠신문 지면 하나에 목을 메고 끝나도 될 것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듯, 이재석도 다르지 않게 그림체만 바꾼 반복을 지속할 셈인가? 잡지 ‘팬티’ 역시 마찬가지. 매주 갈아입되 새 팬티가 아니라 세탁세제 냄새가 물씬 풍기는 헌 팬티에 불과하다.
이충호/ 눈의 기사 팜팜/ 시공사/ 2000. 5/ 1권
SF환타지/ 단행본/ 소년
★★★
발행일 기준 두 번째 타자로 나선 이는 주간소년 ‘쎈’의 이충호. 역대 전적 2타수 2안타. 근 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단 두 작품으로 최고의 타자 대접을 받고 있는 싹수있는 선수. 초기 <마이러브>에서 보여줬던 길쭉한 등신의 캐릭터들이 다소 촌스러워 보였다면, 작달막한 <까꿍>을 지나 온 이충호의 작화는 능숙함이 묻어난다. 팔과 다리를 길고 얄팍하게 내려놓고 있는 팜팜과 주변인들은 작품의 유아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설정을 적당히 전달한다.
그러나 몽환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이유는 뭔가? 성장한 독자층을 위한 배려일까? 아니면 소년지 작가의 성장한 작품 철학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마이러브’의 환한 웃음도, ‘까꿍’의 깜찍한 액션과 스피드도 느낄 수가 없다. 고수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 것처럼 이충호가 어느새 경지에 올랐나? 캐릭터는 움직이고 있으나 거기엔 동적인 요동보다는 정적인 기운이 커 보인다.
잡지 ‘쎈’도 그와 같다. 강력한 만화가들의 ‘쎈’터임을 자임하고 있는 만큼, 작가와 작품 편성은 마이너리그의 최강자답다. 그러나 그뿐이다. 전투력 측정기에 감지되는 작가들의 공력은 상당한데 요동이 없다. 움직임이 없다.
김지원/ 일본으로 간 고교 4년생/ 아선미디어/ 2000. 5/ 1권
드라마/ 단행본/ 청소년
★★1/2
‘고교4년생’을 일본으로까지 보냈지만 만화웹진 ‘코코믹스’ (www.cocomics.co.kr)는 제대로 된 잡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웹진은 비정규리그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 까닭이다.
그러나 아선미디어의 선택은 오히려 전략적 성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잡지출간에 따른 비용부담과 단행본시장의 장기적 불황, 인터넷 만화컨텐츠에 대한 관심 등이 주요하게 논의되던 시점에서 오직 아선미디어만 인터넷 웹진을 택했다. 다른 출판사들이 이제야 웹진을 고려하고 있는 점을 든다면 아선미디어가 선취점을 얻은 꼴이다.
그러나 김지원은 대량득점이 가능한 유리한 공격처에서 마저 실책을 범하고 만다. 1년을 재수하고, 다시 1년은 진짜 꿈을 위해 일본행을 택하게 된 도전적인 캐릭터의 설정. 주인공과 독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설정이다. 그러나 김지원은 자신의 연출력은 뽐낼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미소녀들의 속살 보여주기에 미쳐있다.
웹진 ‘코코믹스’가 그렇다. 인터넷으로 밀려오는 종이만화의 흐름을 가장 먼저 조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색깔없는 투자로 눈치만 보고 있다. 작가들도 기획자들의 작품 편성도. 그저 그렇게 눈치없이 지나보내고 있다.
전세훈/ 퀵/ 삼양출판사/ 2000. 5/ 1권
드라마(액션)/ 단행본/ 청소년
★★1/2
삼양출판사의 진격은 놀랍다. 선배 만화가 출신 사장(오명천)의 에너지가 뻗친 때문인가? 대본소용 일일만화에서 잔뼈를 늘렸던 삼양이 이렇게 막강한 맨파워를 보여주다니? 더군다나 군침나는 일본작가들의 작품도 별스럽지 않게 발행해낸다. 작품기획이나, 편집디자인, 운영 등 어느 것 하나 문제될 것이 없다. 그만큼 안정도가 높아 보인다. 조원행, 김정한, 박성우, 이태호, 전세훈으로 이어지는 손색없는 작가들. 그러나….
삼양출판사의 거침없는 진격만큼 거침없는 작가라면 역시 전세훈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소재의 발굴, 대중적인 장르코드를 통한 이야기의 전개. ‘엔진’에서도 그는 새로운 소재로 승부한다. 수영, 음악, 학원무림을 지나 드디어는 ‘퀵서비스’까지. 학원폭력물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 체험이 가능한 소재이다. 전세훈은 이 퀵서비스 소년들을 추리만화의 공간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러나….
삼양출판사의 ‘엔진’은 놀라운 위용임에 분명하다. 그 어떤 엔진보다 강력할 것 같다는 기대감. 그러나 그 기대감은 여전히 시동 소리일 뿐이다. 그 소리가, 그 거침없는 진격이, 그 속도감이 아직 드러나진 않는다. (끝)
코믹존, 2000 게재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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