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두렵다
친구들과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고서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와서 옆구리를 툭 친다.
‘아저씨 어디가요? 저기 싼 데 있는데. 잠깐 놀다 가요.’
홍조 띤 볼과 어울리지 않게 입을 이죽거리는 아이는 열 대여섯 살 정도 될법하다. 자기 몸을 크게 보이기 위해 털을 세우려고 애를 쓰는 고양이처럼 아이는 연신 어깨 짓을 하고, 팔을 흔들어 댄다.
‘아, 형님 제가 오늘 한번 모실께요. 일단 와서 애들 얼굴 한번보고 다음에 한잔 팔아주세요.’
내 소매 깃을 잡고있는 아이는 제법 당당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무슨 죄라도 지은 냥 ‘다음에’를 연발하며 힘겹게 아이를 뿌리쳤다. 아이는 황급히 걷고 있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쳤다. ‘다음에 꼭 한번 찾아주세요!’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웠다. 일순간 횡단보도 앞에서 찹쌀떡을 팔아달라고 애원하던 교복차림의 여학생이 떠올랐다. 그때도 외면했었다. 나는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피했다. 가끔은 그들이 걱정스럽기도 했고, 기가 막힐 때도 있었지만 겁이 날 때가 많았다.
내가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술을 마시고, 여학생이 파는 찹쌀떡을 산다면 그들에겐 얼마의 이윤이 돌아갈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용도로 쓰여질까?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또 나는 두려웠다. 내가 몽둥이를 집어들고 어제까지 친구였던 아이를 두들겼다면 그들은 대못이 박힌 몽둥이, 또는 쇠파이프를 들고 친구를 만나고 있어서. 내가 화장실 벽에다 선생님을 비방하는 낙서를 했었다면 그들은 핸드폰을 눌러 경찰을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아서. 내가 어렵사리 꼬신 여자친구의 가슴을 더듬자고 밤을 샜다면 그들은 PC통신이나 전화를 통해 ‘번개팅’이니, ‘X팅(잠자리를 전제로 한 만남)’이니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였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이해했다.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우리를 통제하는 언론이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알려주겠다’며 말해줘서 믿게 된 것들이다. 이런 터에 그들의 소비자가 되는 것, 이른바 그들을 ‘원조’하는 것은 안될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왜 거기에 나와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돈을 벌어 무엇을 하겠는지’도 묻지 않았다. 역시 ‘유흥비, 의상비에 쓰여지는 돈은 가치가 없지 않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 때와는 다르게 ‘요즘 아이들은 저렇게 논다.’라고 판단했다.
한번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놀고 있는지 물었어야 한다. 그저 ‘청소년 문제를 논하겠다.’라고 하면 ‘가정문제’부터 운운하는-이 역시 우리가 만들어 놓고 해결하지 않은 것들이다. 우린 어쩌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문제들은 껴안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식이다. 그것 외에도 관심을 가졌어야 옳다. 아이들이 유흥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한다면, 그것도 어른들이 싫어하는 일을 한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돈을 벌려는 것이 ‘유흥비를 위해’, ‘놀기 위해’라고 확신할 수만은 없다.
in 서울, 너는 살아가고 있구나
문흥미의 <인 서울>이라는 만화를 보자. 밤거리를 거닐고 있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들의 집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삐끼를 하고, 단란주점에 나가는 아이들을 만난다. 얼굴은, 생각들은 여전히 아이들 같은 데 몸은 어른이 다 돼버린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사랑하기에도 지쳐있는 듯 하다. 저마다 몇가지씩의 소원들도 지니고 있는 듯 하지만 이를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미 작품 밖에서 그들의 열정은 식어 버린 듯하고, 이 작품은 식어버린 열정으로 살고 있는 아이들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문흥미라는 작가가 아이들을 이해하고 진술하는 방식이 꽤씸하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은 아버지. 경비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자 스웨터를 뒤집어 입은 채 뛰쳐나오는 엄마. 나이든 사람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돈 봉투를 받아드는 누나. 이에 대한 고민으로 학교에서 선생님과 마찰이 생긴 주인공 현민이. 졸속으로 재작된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콘티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작가는 ‘이 아이의 가정환경이 문제가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청소년 문제를 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우리가 그토록 안타깝게 무시하고 있는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듯, 거리에서 행인의 소매를 붙잡고 술집을 안내하는 삐끼들의 가정환경은 삐뚤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의 구성 역시 난처한 수준이다.
현민이와 함께 일하는 나약한 왕따 춘호. 그리고 둘을 사랑하는 척, 사랑 받는 척 놀려대는 해신이. 셋의 삼각고리 속에서 펼쳐지는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와 춘호의 죽음으로 끝나는 엔딩. 게다가 해신이란 여자아이는 꿈(?)에도 등장할 만큼 뻔한 과거를(부잣집 딸이라는) 감추고 생활한다. 작가 문흥미는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에 메달리고 있는 것일까? 이미 오래전에 죽어 없어졌을 비련의 여주인공과 거친 매력남의 이야기를 꾸역꾸역 내뱉고 있는가? 고작 이정도 이야기를 위해 어린 주인공들을 밤거리 유흥가로 불러모은 이유는 뭘까?
이런 의심이 들고난 후에야 작가 문흥미는 나의 신뢰 속으로 진입한다.
아이들의 ‘즐거운 인생’이 아닌 ‘서글픈 삶’. 문흥미가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전형적인 주인공들의 풋내나는 사랑이 아니었다.
문흥미는 이를 위해 아이들에게 한가지씩 직업을 지니게 한다. 유흥가에 나가서 돈을 벌어 유흥비로 사용하면서 타락하고 있음을 보이자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일을 하고, 그 속에서 살아나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밑천없는 노동자가 허구헌날 막일을 나가면서도 변변하게 밥 한끼 사먹을 형편이 안되는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유흥가에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들은 ‘놀이’를 위한 ‘벌이’가 아니라 ‘생활’을 위한 ‘벌이’를 하고 있다.
만화작가 문흥미는 그 뻔한 어른들의 시각(전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의 외침을 보여준다. 근사하고, 멋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 결국은 주장하기를 포기한 채 갖은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슬프게, 내가 울고 우리가 울며 반성해야 할 이야기를 작가는 별스런 치장없이 건넨다.
지쳐 몸부림 치는 것을 ‘불량’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작가의 시선만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어른들이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에 어쩌자고 무작정 집을 떠난 아이들의 무지함을 용서한단 말인가! 한낱 영화의 선전문구가 아닌 인생을 살고 있는 10대들, 그들이 ‘아무런 꿈도 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무슨 수로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고민은 어렵지 않다. 생각을 조금 만 바꾸면 불량학생들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이들로 보일 수도 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들의 최근 선망 직업 1위가 ‘힙합댄서’라고 한다. 대학로에 가면 이 말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거리의 춤꾼을 원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테이지 위에서 춤을 추고자 한다. 그렇다면 당연스럽게 이들이 가고 싶은 곳, 가야 할 곳은 나이트클럽이고 유흥업소이다. 그리고 그 곳에 가기 위해 돈을 벌고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문제는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있다. 언제나 이 방법을 알려주는 이들. 어렵지 않은 길, 손 쉬운 길을 알려주는 이들은 어른들이다.
속칭 ‘삐끼’(술집 등의 호객꾼)들이나 ‘찹쌀떡 걸(Girl)'들이 모두 ’착한아이‘, ’꿈을 가진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돈을 벌어서 나쁜 곳에만 쓴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나쁜 곳‘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놀이‘를 단순하게 ’놀이‘로만 여기지 않는다. ’놀이‘가 주는 부가가치를 측정할 수 있고, ’놀이‘에서 도출되는 ’꿈‘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눈에 혈안이 되어서 떠벌리고 있는 ’문화산업‘의 중앙에도 분명 이들이 위치하고 있고, 그들은 소비자로서 생산자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부르짓고 있다. 이를 위해 소모하고 있는 에너지를 그저 ’불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읽고 싶은 책을 사고 술을 마셨다. 책은 꿈과 가깝게 하는 것이었고, 술은 쉽게 지치는 20대의 인내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삐끼를 해서 무엇을 할까? 단순히 술을 마시고, 이성친구와 연애질을 하며 놀기에 바쁠까? 아니다. 그들 역시 그것을 통해 꿈과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나와 어른들이 이해 할 수도, 상상할 수 도 없는 꿈길로 그들은 가고 있을 것이다. 간혹 우리가 걱정스럽게, 난감하게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은 지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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