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적 이슈를 제공하며 연일 계속되는 검찰과 경찰의 만화 단속과 이에 대응하는 만화창작자 진영의 대립은 급기야 만화가들의 절필선언을 불렀고, 만화전문지들의 종간을 야기했다. 기실 대항의 의미보다 자생의 몸부림이 되고 있는 것은 전년대비 70%이상 하락세를 보이는 판매 부수 탓이기도 하다. 언론의 편협한 인식을 기반으로한 하이에나식 보도는 출판만화에만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세대의 동반 관람이 절대적인 애니메이션 시장에도 영향력을 행사, 의욕적으로 재개된 애니메이션 개봉열풍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디즈니의 강력한 유혹(『헤라클레스』)마저도 근래 최하수준인 38만명 동원에 그치고 말았고, 우리 만화영화는 최근 개봉작 3편이 14만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그 덕인지 여름방학 성수기는 코미디장르의 극영화가 강세를 보이며 롱런하고 있다. 만화판은 마치 도미노판이 되기라도 한 듯 쉴새없이 쓰러졌다. 전례 없이 여기저기서 난립했던 만화관련행사들도 기대치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계획된 행사 역시 난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고통스런 폐막을 맞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근대이후 만화는 문자 매체를 위한 들러리 서기에 바빴다. 미국의 초기연재만화는 잘 알려진대로 신문의 부수 경쟁을 통해 시작됐다. 아우트 콜트의 『노란꼬마Yellow Kid』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최초의 연재만화인 『다음엇지』는 교훈성을 염두에 두고 출발한다. 일제강점기 언론검열이라는 이유도 있거니와 『허풍선이』 등의 우스개 만화를 통한 부수 경쟁도 차후에 전개됐지만 그 역시 유해성이나 선정성과는 다르다. 우리 만화는 저급함이나 유해성 시비를 저변에 두고 단순 판매경쟁을 위했던 것이 아니라 민중 계몽을 위한 교육적 매체로서 출발한 것이다. 이런 우리 만화에 대한 역사인식 부재가 만화의 유해성 논란을 야기시키는 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근대 만화의 시작은 국민계몽에 있었으나 5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문화조성으로 우리만화는 일본만화에 근접한 것이 됐고, 대중과의 친화도를 넓히려던 만화창작인들은 급기야 밥그릇 싸움의 국면을 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음울한 시기의 민중은 매체로서 만화가 지닌 독특함을 져버리지 않았다. 출판시대의 영상매체로서 갸륵한 애정을 보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만화의 졸속제작이 승인됐고, 저급함의 논란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신문만화중심의 만화가 책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우리만화의 초입에 해당되던 만화의 고전적 형태(신문만화)와 의미는 오락매체로 변화한다.
당시 문화의 선점지를 부르짓었던 편협한 문자매체 지식인들에 의해 만화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매체들은 쉽게 격하됐다. 신문만화의 발전이 초기상태에서 크게 변모하지 못한 원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극화의 도입으로 만화는 매체로서 중흥기를 만들어냈지만 끊임없는 창작진영과 유통망에 대한 감시로 인해 보다 음습한 지역으로 웅크러들 수밖에 없었다. 만화의 실질 수요층은 지속적인 연령상승화 구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표면화된 인식은 아동문화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70년대 아동만화전문지의 활성으로 대본소는 아동들을 위한 공간에서 탈색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80년대 들어 만화방의 자구노력은 성인들을 위한 소규모 종합위락공간으로 조성됐다. 이현세의 과도한 성공도 이 기점에서 이루어졌다. 만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조성되었던 시점이었지만 이로 인해 우리만화의 단일화 현상이 벌어졌다. 극화체의 유행으로 까치체(이현세의 캐릭터를 그대로 모방한 작품들) 만화가 대다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만화광장》, 《주간만화》 등 성인용 전문 만화잡지들이 창간되면서 고급만화(?)와 저급만화들이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부와 편협한 지식인들의 음흉한 감시는 지속되었고, 급기야 청소년의 탈선을 조장하는 유해공간으로 만화방이 선정되는 참혹한 상황을 맞이한다. 88올림픽을 전후해서 벌어진 이와 같은 움직임 뒤에 만화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고, 유통망을 개선하는 등 자구의 노력을 취하면서 매체로서의 만화가 새로운 인식 위에 자리잡게 되었다.
90년대 출판만화의 발전은 일본화된 작품성향 또는 일본만화에 의한 것이었지만 정부측의 만화산업에 대한 인식 조정과 관련기업들의 참신한 투자가 함께 하면서 만화강국으로서의 문화적 수용자세를 취해 나아가게 됐다. 이 과정에서 열린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은 고조된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교량 역을 충분히 해냈고, 만화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비평문화가 함께 조성되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과밀한 기대감이 한풀 꺽이기도 했지만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미래문화산업으로서 만화매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꺽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진행됐던 민간단체의 만화 유해론과 정부의 민심 끌어안기식 선심행정이 절묘한 팀플레이를 이뤄내며 만화 매체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다. 일부 선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에 대한 심판이 아닌 특정 매체를 표적으로 두고 진행된 이 사태는 점층화 구도로 발전, 최근 사태까지 이른 것이다.
특정 매체에 대해 지독하리만치 집요하게 번져버린 일단의 사건들은 자생의 의지를 키워가고 있는 우리만화 창작자 집단을 궁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70%이상이라는 견해가 나올 정도로 급속하게 신장화 구도를 보이고 있는 일본만화와 영상물이 보다 빠르게 보편화 구도를 취하면서 점유세를 보일 것이 분명하다. 영상물에 대한 점유도는 이미 오래 전에 자구의지를 펼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지만 출판만화에 있어서 만큼은 그나마의 보합세를 취해왔으나 이제 그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부 스타작가들에 대한 독자 편중화가 우리만화의 질적 향상에 저지요소로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의 절필은 보다 심각한 국면을 만들 것이 뻔하다. 만화가 학원폭력의 주요한 요인으로 평가되었고, 이를 일반이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라면 이 매체의 대중 파급효과는 광폭적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이런 터에 긍정적 수용의사가 아닌 적대적 통제구조를 이끌어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보다 불법화된 유통경로를 통해 보다 불법화된 인식자들이 매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돕겠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만화는 출판영상물의 성격을 지닌다고 앞서 기술했지만, 보편적인 영상매체가 지니지 않은 사용자 환경을 지니고있다. 이는 문자매체와도 연결된다. 즉, 글의 행간을 읽는 것처럼 만화의 칸새를 읽는 것이다. 현대만화가 그림 위주의 세밀한 묘사를 중점화시키고 있다고 하지만 칸과 칸을 분리해 논 칸새는 사유화의 근거지로서 지속적인 프레임의 연결화로 이어지는 영상매체와는 상이한 부분인 것이다. 즉, ‘생각없이 보고 읽으면 되는 것’ 이라는 명시는 만화의 칸새를 무시하고서야 비롯되는 것이다. 이는 읽는 이에게 환상작용을 일으킨다. 대중매체는 일반적으로 해소를 위한 기능성을 지닌다. 만화 역시 감정의 해소를 위한 매체인 것이다. 그것은 응집을 원한 뒤 실제상황으로 연결, 해소국면을 연출하는 것일 수 없다.
만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인식 자체의 부제는 우리만화 역사에 대한 올바른 확립이 없었고, 이를 위한 노력 역시 게을렀다는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미국, 일본 등의 경우와 다르게 초입의 단계에서 민중계몽의지를 지니고 있었던 우리만화는 발전기에 일반의 무지한 매도에 의해 기형적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하지만 줄기의 기형적 성장이 열매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만화 선구자들의 의도처럼 우리만화는 아직 계몽의지를 꺾고 있지 않다. 다만 일반의 인식이 매체의 격상을 막아섰던 것뿐이다. 우리만화의 굳건한 뿌리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일반의 검증작업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준비가 선행된다면 최근과 같이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만화에 대한 매도는 없을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