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기계전사 109의 만화시기, 만화시비탕탕탕, 1999


 『기계전사 109』의 만화시기


아이큐점프의 등장


6천여 종 1천여만부의 만화도서를 출판한 1989년 만화계는 1988년 연말에 이어 2월 실시된 저질성인만화 단속 등으로 인해 대본소의 폐업이 줄을 이었다. 대본소는 50년대의 아동을 위한 장소에서 그들이 성인으로 성장한 80년대에 아동에게는 적대의 장소로 공인됐다.

동네어귀의 전봇대처럼 익숙하게 자리했던 만화가게의 입간판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2층 또는 지하라는 밀폐의 공간으로 잠입했던 업소들 마저 ‘천박한 것’이라는 손가락질 앞에서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문구점을 중심으로 축쇄본 일본해적판 만화들이 저가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87년 대본소를 통해 한차례 일본만화 읽기 훈련을 거친 우리 독자들은 더욱 열정적인 집착을 보였고, 급기야 마니아 집단을 형성해내기에 이르렀다. 만화 독서 문화는 대여에서 구입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는 만화로 인한 신 문화조성이 아닌 망가에 의한 문화변혁이었다. 이러한 때에 서울 문화사의 《아이큐점프》가 창간호를 발간하고 중앙지에 광고를 개재하기 시작했다. 1천원의 책값을 명시하고 당대 최고로 치부되던 이현세와 허영만을 필두로 십만부 출간이라는 욕심을 선전해댔다. 두 작가 이외엔 왜색이 완연한 편집방향을 제시하며 일본만화에 익숙해 있는 독자층을 이끌어 냈다. 불법복제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던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을 정식 출판하면서 기존 아동지가 형성해낸 독자층을 넘어서는 세대에까지 소비층을 확장했고, ‘드래곤볼 신드롬’을 조성하면서 만화문화의 새로운 대안자로 선두에 위치한 것이다.


일본만화의 시기와 순정 계보의 극화 도입


8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 소비층의 연령은 20대 이전으로 넘어갔다. 사회적 저항세력이었던 63년생들의 시대착오적 발상은 문학 이외에선 소구되지 않았다. 이에 키취 또는 카피문화론자들로 대두하고 있는 70년 이후 생들은 새로운 언론 틀-컴퓨터통신, 동호회지-을 형성하며 개별적 논지정리에 심열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영화를 너머 비디오를 택했으며, 문학을 너머 만화를 지니길 원했다. 여타문화 취향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저 디토(Ditto)-동감이라는 뜻으로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주인공들에 의해 사랑의 대리 표현어로 사용-라고 멋스럽게 내뱄을 상대가 와주기 만을 원했다. 그들에게 대상이라는 것은 무의미 했으며,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었다. 그들은 다문화가 펼쳐지길 원했으며 창작물이 건네는 네러티브를 포기하므로서 재배치가 가능한 네러티브를 이끌어냈다.

영화는 시간을 정지시키거나 재배열 함으로서 순차적 정서 형성이 아닌 찰나적 공감 형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일부러 만들어지는 것의 가식에 힘겨워했다. 그리고 자신과의 동의하에 시간이 진행되고, 머무름과 떠남을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초현실의 공간문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만화임을 말했다.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진 않았으나 우리 만화 중 그들의 소구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을 순정만화라 칭했으며 『별 빛 속에』 부유하며 『북해의 별』을 찾아 나서길 원했다.


스토리작가 노진수는 80년에 관해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70년 이후 태생자들의 고뇌를 미래공간에서 펼쳐지는 암울한 상황과 타결책으로 대두된 투쟁으로 이끌어 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허영만의 계보에 위치한 신예 만화가 김준범을 등장시킨다. 김준범은 이 한 작품으로 한국의 대표작가 명단에 수록되었으며 『기계전사 109』는 문화평론가 김종엽이 선택한 12편의 한국만화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 


일본만화의 저가본과 점프의 뒤를 이은 챔프의 저가정책이 유효성을 들어내면서 대본소의 공간은 협소해졌고 서점에 만화코너가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이는 기존 만화작법에도 큰 영향을 가져온다. 독자의 선택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던 두 출판사는 만화방(대본소)-단정할 순 없지만 한국 만화판-이라는 바닥을 두고 만화의 형식 자체를 희석 시켜 냈던 것이다. 이와중에 정통 순정만화-이 용어 자체를 따로 쓰기가 너무도 싫다. 만화의 한 장르로서 순정만화를 구분해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순정만화도 만화 안으로 포함시켜놓고 내용상의 구분법으로 분류 되야 할 것이다.-체가 새 세대 문화 성향자들에 의해 과도하게 소구 되고있음이 일본에서는 확인됐다. 이에 우리 나라로 파급되어진 상위문화보유자들의 기치는 성년극화에서의 간결한 선과 묘사를 일궈낸다.


80년 초 거친 터치로 세대의 부름을 받았던 이현세 조차도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선의 굵기를 조절하고 전체적인 화면을 단아해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다 확실한 담보를 얻어낸 것이 전자에 기술한 순정만화의 득세이다. 항간에 순정만화가 보다 남성 지향적인 편집체계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여성작가들의 중앙진출에 대한 기대감 섞인 논거들이 넘쳐나고 있으나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성년극화 쪽에서 먼저 순정만화와의 합의요소를 찾아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순정만화의 컷 구성이나 연출의 변화가 기존 틀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는 있지만 이는 ‘머무름과 떠남’을 위한 배치라 보는 것이 옳다. 기존 순정만화에서 컷 사용의 모호함이 내러티브의 연장 또는 감성의 지속적 배열에 의한 것이었다면 단순 컷의 사용은 극화의 성향을 지니려는 것이 아닌 컷 안에 담긴 내러티브의 독자성을 위한 것이라 보인다. 이는 파편화된 구성의 반감 된 표현인 것이다.

90년대 초반이 되면서 한국만화는 기존 극화체 형식의 선을 가늘게 만들어갔고 순정체의 캐릭터에 볼룜있는 선을 사용, 변화를 이끌어 갔다. 소위 일본망가체 형식이라 결론지어지기도 하는 이러한 형태의 화풍이 성공의 지표처럼 각인 된 것이다.


허영만 만화와 젊은 만화작가


97년 한국 만화계에서 허영만 문하라는 것이 주는 프리미엄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여타 작가의 문하생들이 그 틈새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반면 3대 만화전문지들 속에서 허영만 문하를 거친 신진작가들이 대거 등장 위상을 드높이고 있으며, 일간 스포츠 신문에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는 허영만이 지닌 상업성과 일켠의 작품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하는 부분이며, 도제수업시의 강도 역시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김준범 역시 허영만의 도제수업을 득하고 나온 작가이다. 하지만 문하를 거친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 허영만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던데 비해 김준범의 『기계전사 109』는 허영만 식의 만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김준범의 의도적 배제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 흔적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나지 않음을 항간에 논의되는 표절의 흔적이라고 말한다면 과도한 것일까? 이는 만화 창작시 그림실력과는 동떨어진 방향성을 지닌 연출의 힘과 결부되는 부분이다.

김준범은 데뷔작이 기대이상의 성공을 보이자 통신에 만화관련 토론장을 운영하는 등 만화매체에 대한 의식을 들어냈다. 그리고 후속 작업은 전작과는 다른 형식과 내용성을 지니고 나타났다.  사회현상의 심각한 부분까지 의도적으로 치고 들어가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경우에선 허영만의 그것들이 보여졌으며, 연출 역시 기대 이하의 것들로 가득했다. 『기계전사 109』는 그 즈음의 작가들이 그러했듯 적당한 교본에 익숙한 작가의 무의식이 발산해낸 아류작일 수도 있다. 만화의 컷 구성은 시점의 작은 변화에도 극히 민감하게 작용된다. 가장 효과적인 컷 구성을 만들어 내는 데는 그만큼 많은 수련과 도정을 겪어야 가능하다. 아니 어쩌면 훈련 된 노력자에게선 도저히 얻어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계전사 109』의 연출은 많은 흠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숙련된 모습을 보인다. 캐릭터의 안전성 또한 신예작가의 그것이라 할 수 없었으며 메카닉 연출 역시 23살의 작가가 일궈내기엔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완전한 듯 보였다. 까닭에 김준범의 후속작은 너무 이른 대작의 판정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일반의 견해를 적당선까지 수긍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며 자신을 알린 메카닉을 포기한다. 가족을 택하고, 휴머니티를 강조하며, 청소년문제를 택한다. 

『한국의 만화가 55인』을 엮은 김성호는 한국 SF만화의 세 작가 중 한명으로 김준범을 소개하고 ‘젊다는 점은 변화에 민첩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정서기반의 탈 한국적인 요소...’ 등을 지적한다. 젊은 작가 김준범은 허영만의 독창성과 상업성을 이어받았으며 작품성까지 확보해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도 근간에 허영만의 모습처럼.


블레이드런너, 기계전사 109


김성호의 전서에 기술된 인터뷰 중에 김준범은 “나는 만화책을 잘 안 본다. 언제부턴가 그것이 얼마나 나를 짜증스럽게 하는 일인가 하는걸 느꼈기 때문이다. 내겐 내가 가야 할 나만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이 광풍이 부는 황토길이며 숨이 막히고 곳곳에 구덩이가 있을지라도...”라고 말한다. 1989년 이전 김준범은 만화책을 많이 봤다. 그리고 그 시대 일본 메카닉 만화의 유일한 화두였던 사이버펑크를 택한다. 일본 사이버펑크 계열의 만화작품은 허리우드 영화와의 동조로 성장 가도를 이뤘다. 89년 아직 한국에는 이 계열 중 어떤 형태의 창작 매체도 등장하지 않았다. 90년 말이 되서야 간헐적으로 SF소설이 등장했고, 디스토피아적 정서론자들의 대두와 활성으로 인해 아카데미즘이 그윽한 만화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 만화의 경우 그 묘사가 완연한 표절 행각들로 점철되고 있음은 유감이다. 문학의SF적 창작소설 역시 그 표출 작태가 심히 우려되는 수준이다. 


기계전사 109중 도입부는 특수경찰인 주인공 아내의 죽음과 사진이 주는 기억의 문제로 대두된다. 주인공은 아들을 위해 부인의 형상을 한 복제인간(replicant)을 만들어낸다. 이는 구회영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서울, 한울, 91), p91-92

의 서술대로 인간/모조/합성/ ‘기억’에 관한 문제로서 폴 베호벤의 『로보캅』과 상동구조를 지닌다. 로보캅은 기억이 없음으로서 기계가 되고, 기억을 찾음으로서 인간이 된다. 하지만 스토리 작가 노진수는 폴 베호벤의 방법과는 다른 길을 정하고 『블레이드 런너』 [에이리언], [블랙레인]의 리들리 스코트 감독 작품. 80년대 영화 중 시가효과에서 단연 최고라는 평과 함께 당시 관객동원 실패로 저주받은 걸작 명단에 올려졌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재개봉을 계속하는 등 인지도를 넓히면서 컬트의 명단에 올라있다. 더글러스 트럼벨의 특수효과와 반젤리스의 음악 역시 압권이다. 

를 개입시킨다. 이는 유전공학에 의하여 유전자합성으로 만들어진, 인간과 생물학적으로는 동일하나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복제인간에게 기억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제시되고, 이후 복제인간들의 대 인간 투쟁을 위한 초석으로서 도입된다. 리들리 스코트에 의해 1982년 발표된 SF필름느와르영화 『블레이드 런너』는 일본화된 미래의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있는 기계인류의 퇴치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들을 제거하며 인간성을 잃어 가는 블레이드런너가 기계해방 전사가 된 자신의 아내모습을 한 복제인간과 특수경찰인 주인공의 싸움이라는 등식으로 『기계전사 109』에 그대로 차용된다. 


영화 전문지 《키노》는 일본애니메이션의 계보도를 늘어놓으면서 허리우드는 일본의 망가를 망가는 허리우드를 카피하고 있음을 밝힌다. 윤승용, {키노}, (96. 11), p116-117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상호 존경과 예우의 선 안에 있음을 적어 낸다. 이제 우리의 만화도 그들 상호협력 틀에 개입하고자 한다. 그럼 우린 그들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가? 『터미네이터2』가 『아키라』의 장면들로 이루어지듯, 『사일런트 뫼비우스』가 『블레이드 런너』의 장면들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법칙을 만들어 지켜가고 있다. 우리만화가 그들의 교류에 끼여들어 빨대를 꽂고 있다. 그렇다면 뭔가를 제공해야 하지 않는가? 


한국의 만화는 스스로를 키우기 위해 독자를 포기한다. 만화 자체로 줄 것이 없음으로 독자를 반분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만화는 남아있지 않게 하고 망가와 어설픈 코믹스트립 만이 난무하게 한다. 하지만 누구도 무엇이 정말 만화이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만화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광의의 단어로만 인용되고 있는 까닭이다. 


대표작가 김준범


김준범은 『기계전사 109』로 만화가협회가 지정한 신인만화가상을 수상했고, 한국의 대표작가 30인 중 한 사람으로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에 출현했다. 많은 만화평론서에 그의 작품과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나이 서른을 갓 맞이한 그는 몇 년 사이에 한국의 대표작가 중 하나로 자신의 이름을 만화판에 안치시켜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화인가?-하긴 요사이 잡지 만화는 20살 안팎의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작품들의 대개가 문학판에서의 사랑시집과도 같은 처우를 받고 있는 터에 김준범에 대한 일반의 기대는 놀랠 만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슬픈 일이기도 하다. 구태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동일 작품들의 변용작으로 연명해 가고 있는 몇 작가에 의해 만화판은 움직였었다. 이에 그의 등장이 뜻하지 않은 축복인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시 무게를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어린 작가일 뿐이다. 격상시키기 전 한 번 더 의심하고 훈련시켰어야 했다. 그의 후속작 『부전자전』, 『버그』 등이 졸작이진 않지만 어설픈 네러티브의 전개와 한 템포 늦는 듯한 시대독법, 그리고 작가적 견지와 철학부재 등은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독자는 김준범이 ‘가정’과 어설프게 전개하고 있는 ‘음악이야기(또는 춤)’을 말하길 원치 않는다. 전작에 대한 과한 성공이 후속작의 성공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고, 소담한 이야기로 방향을 선회한 어린 작가의 판단은 옳았다. 이젠 그 이후가 문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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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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