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당선자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문화 애호가는 김대중 이다. 선거전부터 영화전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영상산업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고, 애니메이션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순정 호러 잡지 《아디》에 까지 출현 창간인사를 할 정도로 김대중은 문화마인드가 있는 지도자임에 분명하다. 여기저기 가리지 않는 선거 전략일 뿐이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무지에 가까운 문화정책을 펼쳤던 역대정권에 비한다면 그나마 깨어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미술 전시전 ‘호랑이의 눈’전에 참여 호감 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IMF체제하에 놓인 경제위기 상황은 문화를 거품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에 의해 난도질당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의 문화정책도 과거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경제재건이라는 당위성 앞에 무너져 벌릴 것만 같다.
당선자의 문화공약은 실로 장대하고 세세한 모양새를 갖췄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그의 이미지와 무척이나 걸맞아 보인다. 그러나 연초 중앙언론은 정부의 문화정책과 투자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나섰다. 방송은 IMF체제라는 빈곤의 상황에 발 맞추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인기 쇼 프로그램의 대폭적인 축소와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트랜디 드라마의 중도하차 등이 직설적으로 제기되고 실행됐다. 만화계에서도 위기의식 없이 무대기로 열렸던 각종 문화행사들을 통합한다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류값 등의 인상으로 올해도 출판불황은 계속될 것이고, 만화출판계의 위기도 예고되고 있다.
당선자는 작년 8월 만화사태가 벌어졌을 때 스포츠신문들과의 대통령후보자 인터뷰에서 만화산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적극지원을 약속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선자의 또 다른 공약으로 이미 그 여파가 방대해지고 있는 일본문화 개방은 우리문화의 자생력 확충 전에 이뤄질 것으로 보여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문화전반의 불황으로 시들해진 문화창작열기는 경쟁국면을 만들어낼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이미 일본문화의 여파에 대한 검증이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에 이어 성적담화가 짓게 깔린 일본만화 『짱구는 못 말려』가 작년도 초등학생이 뽑은 베스트셀러 순위를 자치하고 있고, 중고등학생들 사이에 『에반겔리온』 신드롬이 생기는가하면, 비디오 마니아들 사이에 미야쟈키 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은하철도 999』의 재방영으로 30대 만화팬의 귀가가 빨라졌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하고, 일본문화의 도입으로 거리는 세라복 천지가 되는 등 극심한 문화병리현상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런 만화문화환경에 대한 정부의 대 만화정책은 전년도에도 변함없이 심의와 강압적 자율규제 등으로 이뤄졌다. 청소년보호법의 제정과 함께 청소년보호위원회를 결성 우리만화의 창작열(?)을 감시하고, 불건전한 표현물을 찾기 바빴다.
지금까지 정부의 문화정책은 가시적인 전시행정으로 이뤄져 왔다. 문화에 대한 지원은 대형건물을 짓고,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을 긁어모아 늘어 논 뒤 명패하나 붙여두면 끝이 났다. 문화인들 사이에서 문화지원으로 덕본 사람은 건축쟁이들 밖에 없을 거라는 실소가 넘칠 정도인 것이다. 인력과 예산규모 등에서 중앙부처를 능가하는 문화체육부의 비효율적인 운영도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예산의 1%에 못 미치는 예산(6천5백30억여원)을 운영하는 곳이지만 14개 직속기관에 2천5백58명의 인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23개 산하기관과 유관단체가 있다. 마사회를 포함한 전체사용예산은 무려 3조78억6천9백여만원이 된다. 해마다 감사원은 문체부에 대한 방만한 구조와 예산사용에 대한 지적을 해왔다. 하지만 별다른 자정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새 정부의 문화정책, 더 나아가서 대 만화정책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현안적인 문제를 택해야 할 것이다. 이제 국민은 ‘문화산업 적극지원’ 따위의 황량한 선언을 원하지 않는다. 경제국치 하에 있는 최근의 상황에 연연하여 문화에 대한 지원을 게을리 하는 것 역시 아니될 말이다. 경제는 국민단합으로 재생시킬 수 있지만 문화는 국민단합 따위의 통제정책으론 일궈지지 않는다. 경제는 세일즈로도 가능하지만 문화는 경작을 필요로 한다. 게으른 농부에게 땅이 축복을 주지 않는 것처럼.
모 벤처 기업인이 얼마전 방송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경제는 60년대 여공들의 손에 의해, 70년대에는 기능공들에 의해, 80년대는 세일즈맨들에 의해 발전됐고, 90년대 이후에는 벤처기업에 의해 지탱될 것이다.’ 맞는 얘기일수 있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여보자. 2000년대 우리경제를 책임지는 건 문화산업이 될 것이다. 김대중 당선자가 이를 간과하지 않는 정책을 펴길 바란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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