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순정 만화의 놀라운 변신, 1999.08.19

90년대 감성으로 인기몰이…장인 정신 가다듬은 작가 급증  
 
만화 전문지 <오즈>에 작가론을 발표하고 있는 만화 평론가 나호원씨는, 순정 만화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순정 만화로부터 한국적인 근대성의 특징을 규명할 단서를 두둑히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정 만화의 관습을 낱낱이 분석했다. 하나같이 금발에 팔등신 미녀인 까닭은 무엇일까? 중세의 귀족 문화를 배경으로 삼는 이유는? 왜 그렇게 기억 상실의 모티브가 잦을까? 그는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일수록 현실과 욕망 간의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 휘황한 꿈동산을 만들어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씨처럼 본격적인 비평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순정 만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평소 순정 만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한 만화가는 “남성들이 주로 보는 스포츠 만화나 액션 만화·군대 만화가 남자들의 욕망과 환상을 풀어내듯이, 순정 만화가 여성들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출판 만화 관계자들은 순정 만화의 경쟁력에 큰 기대를 건다. 이들은 “<슬램 덩크>나 <드래곤 볼>과 대적할 만한 한국 만화는 없지만, 순정 만화라면 얘기가 다르다. 일본 만화와 겨뤄도 승산이 있다”라고 입을 모은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듯 최근 순정 만화계는 3파전에 돌입했다. (주)시공사가 격주간지 <케이크>를 창간하며 순정 만화 잡지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서울문화사와 (주)대원이 분점하고 있던 시장은, 시공사의 가세로 불이 붙었다.



순정파 소녀·비련의 여인 사라져

순정 만화의 폭이 넓어지면서 ‘소녀 취향의 현실 도피적인 만화’라는 혐의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현상은 소재의 다양화다. ‘신데렐라 증후군’혹은‘잔다르크 증후군’에서 비켜나 시대의 감성에 밀착하는 작품이 늘었다. 거대 담론의 시대였던 80년대부터 순정 만화는 <북해의 별>(김혜린) <이오니아의 푸른 별>(황미나)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 등 사랑과 혁명을 테마로 한 장대한 작품으로 명성을 다졌다. 사랑놀음 대신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통해 순정 만화의 틀을 다듬은 것이다. 여성 작가 동호회 ‘나인회’ 결성(85년)을 거쳐 월간지 <르네상스>(89년)가 창간됨으로써 순정 만화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90년대 순정 만화의 특징은 ‘일상의 복권’과 ‘관습의 전복’이다. 소재가 일상으로 확대된 데다가, 기존 순정 만화의 관습까지 비웃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 식의 비장미보다는 유머와 솔직함이 강세다. 쌍둥이 엄마의 육아 전쟁을 그린 <마이 퍼니 베이비>(김지윤), 뻔뻔스럽지만 귀여운 소녀 자두의 성장기를 그린 <안녕, 자두야>(이 빈)는 코믹 순정물을 대표한다.

청춘물 가운데도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뒤엎는 작품이 많다. 멋진 남자를 기다리는 순정파 소녀, 운명에 농락당하는 비련의 여인은 더 이상 없다. 대신 여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떳떳이 드러내고, 과격한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왈패들의 학교 생활을 그린 <걸스>(이 빈)에는, 눈동자에 별이 가득한 소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말뚝 박기·닭싸움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는 그들은, ‘갈래 머리, 하얀 칼라’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박살낸다.

이전의 순정 만화에 등장했음직한 우아한 드레스 차림인 수지는, ‘왕공주’로 희화화된다. <쿨 핫>(유시진)의 주인공 루다는 ‘지지부진하고 알 수 없는 것들을 보면 머리가 아픈’ 통 크고 선 굵은 여학생이다. <언플러그드 보이>(천계영)는 평범한 여고생 지율과, 학교에 다니지 않는 잘생긴 남자 친구 현겸을 통해 새로운 이성 관계의 모델을 보여준다. 울고 있는 지율에게 ‘슬플 때면 힙합을 추라’면서, 건들건들 춤 시범을 보이는 현겸을 보며 여성 독자는 ‘뒤집어진다’. 섹시하지만 순진하기만 한 남자 친구와‘저 애는 언제 클까’하며 방바닥을 긁는 여고생은, 천사표 소녀와 음험한 소년의 구도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이다. 힘겨운 전복이 아니라, 가벼운 비상이다.

<툰>의 박무직씨처럼 아예 만화의 관습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는 패러디 전문 작가가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남자 작가인 그는 순정 만화 잡지에 작품을 연재하고 있으며, 순정 만화를 자주 패러디한다). 만화 평론가 이재현씨는 “자신의 작품 안에 다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해석을 곧바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선배 작가와 다르다”라고 말했다. 만화 동호회 회원의 일상을 소재로 한 <툰>의 경우, 주인공의 이름은 장길산·캔디·란마·혜성 등이다. 그리고는 친숙한 캐릭터와 장르의 관습을 마구 비튼다.

단편 만화를 발표할 잡지가 늘어난 것도 고무적인 성과를 낳았다. 문흥미의 <디스>와 최인선의 <속 보이는 놈>은 단편의 미학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손꼽힌다. ‘오늘의 좋은 만화’에 선정된 문흥미의 <디스>는, 담배를 매개로 소시민의 삶을 처연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 담배를 피워 물었던 한 사내는, 비닐 봉지를 뒤집어 쓴 채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지만 봉지에 난 담배 구멍 때문에 목숨을 건진다. 만화 평론가 박석환씨는 “문흥미가 잔잔한 여운으로 승부하는 데 비해, 최인선은 주변의 위선을 낱낱이 까발리는 공격성을 지니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새로운 문제 의식을 담기에 적합한 SF 판타지도 늘었다. 표범·뱀·인간의 난자 등 유전자 조합을 통해 태어난 괴물 에이프릴과 사이보그의 사랑을 그린 황미나의 <천국의 계단>, 강경옥의 <별빛 속에>가 대표작이다. 순정 만화가 순백색 순정의 세계를 그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유시진·강경옥·이정애의 작품은 별천지다. 이들은 황미나·김혜린·신일숙 등 카리스마가 넘치는 작가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낭만적인 색채가 강한 선배 세대와 달리 이지적이고 차가운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중퇴하고 만화가가 된 젊은 작가 유시진은, 열혈 팬을 거느린 컬트 작가다. 만화 평론가 나호원씨에 따르면, 유씨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상대를 도발적으로 쏘아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전의 여자 주인공이란 운명을 개척하기보다는 격랑에 휘말리는 존재로, 혹은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단련하는(<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넷째딸) 인물이었던 것에 비해, 유시진의 주인공은 적과 직접 싸운다. 오만하고 능력이 출중한 딸들은 폭군인 아버지와 맞서거나(<신명기>), 위선적이고 무책임한 아버지를 싸늘하게 경멸한다(<쿨 핫>). 시련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적과 싸우기에 한숨 짓거나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기 순정 만화 작가, 스타로 자리매김

이런 흐름 가운데 ‘사건’으로 다루어지는 작가가 있다. 바로 천계영(29)이다. 그에 대한 중평은 ‘관습 무시, 예측 불허’라는 것이다. 독학으로 기본기를 다진 그는 ‘만화계의 서태지’로 불린다. 데뷔부터 화려했다. 좀처럼 대상을 내지 않는 잡지사의 신인 공모전에서 보기 좋게 대상을 따냈다. 심사를 맡았던 황미나씨는 ‘나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진짜 90년대 감성’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천계영은 두 권짜리 장편 <언플러그드 보이>로 최고 인기 작가로 떠올랐다. 매니저 임경아씨에 따르면, 이번 방학 때 천씨를 보겠노라며 찾아온 독자가 백여 명에 이른다. 만화가 박무직씨는 “천계영은 모든 점에서 예외다. 서태지가 그랬듯이 기존의 어떤 잣대로도 그를 잴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화여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뒤늦게 만화가가 된 천씨는, 기성 만화를 많이 접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신인답지 않게 지면 운용이 과감하고, 그림체 또한 대담하다. <윙크>의 오경은 기자는, 천씨 특유의 한국적인 감수성에 점수를 주었다. 일본 만화를 많이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관습을 따르는데, 천씨는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등장 인물의 이름을 달봉·국 철·명자 등 토속적으로 짓고, 부푸러 풍선껌·송월 타월을 소품으로 등장시키는 등 잔신경도 많이 쓴다. 단편집 <컴 백 홈>을 출간한 데 이어, 음악 신동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디션>을 <윙크>에 연재하고 있다.

한국의 순정 만화가 일본 만화와 겨룰 만하다는 진단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비순정 부문의 경우 일본 만화가 대여 순위 집계에서 상위권을 휩쓰는 데 비해, 순정 만화는 한국 작품이 강세다. 판매 부수도 많고, 독자의 호응도 뜨겁다. 작가 수와 생산량이 적은 데 비해 작품의 질이 고르고 독자의 만족도가 높다는 것은 만화계의 정설이다. 전문가들은 공장식 대량 생산이 아닌 수공업적인 작업 방식을 한 요인으로 꼽는다. 인기 있는 남성 작가의 경우, 문하생 수십 명이 공동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비해 여성 작가 가운데 공장 시스템을 가동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작가가 이야기와 그림을 몽땅 책임지는 순정 작가들의 작업 방식은, 한때 저효율의 원인으로 꼽혔지만 점차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표 주자가 황미나씨(38)다. 80년대에 <이오니아의 푸른 별>로 데뷔한 그는, 최근에도 공상 과학 판타지(<레드 문> <천국의 계단>), 추리물(<아르테미스의 활>), 시트콤 형식의 코미디(<이씨네 이야기>) 등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있다(그는 한국 순정 만화 작가로는 처음으로 일본과 한국 잡지에 <이씨네 이야기>를 동시 연재하고 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신입생의 학회 교재로 쓰일 만큼 사회 의식이 뚜렷했던 <북해의 별> 작가 김혜린씨는, <광야>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그려내고 있다.

한국 순정 만화 낙관론자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장인 정신을 견지한 작가가 많고 독자의 애정 또한 각별하다는 점을 들어 장밋빛 미래를 그린다. 실제 순정 만화에서 작가와 독자는, 스타와 팬의 관계를 방불케 한다. “순정 만화 독자는 일단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면 확실하게 밀어주는 경향이 있다”라고 만화 잡지 <윙크>의 오경은 기자는 말했다. 남성 독자가 재미있는 작품을 찾는 데 비해 여성 독자는 좋아하는 작가를 좇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황미나·김혜린·신일숙 등 80년대 대표 작가들은 여전히 열혈 팬을 거느리고 있다. 만화가 최찬정씨는 “독자가‘순정파’이기도 하지만, 작가들이 그만큼 흡인력이 있다는 증거다”라고 말한다.

한국 순정 만화의 들풀 같은 생명력

하지만 순정 만화의 경쟁력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만화가 박무직씨는, 현상만 놓고 보면 낙관할 근거가 없지 않지만 경쟁력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만화에 관한 한 ‘일본에 없고 한국에 있는 것’은 없기때문이다. 순정 만화도 예외가 아니다. 아직까지 일본 만화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선이 유지되고 있지만, 곧 그 경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박씨는 “만화 잡지가 처음 일본 만화를 선보였을 때 초기에는 항의가 빗발쳤지만, 서서히 인기에 가속이 붙었던 현상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재미이지 국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요즘 연재물 가운데 요코 가미오의 <꽃보다 남자>, 클램프의 <좋으니까 좋아>는 인기가 선풍적이다. 박씨는 그래서 “경쟁력이 아니라 생명력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라고 말한다.

만화가 최찬정씨도 비슷한 이유에서 발상 전환을 촉구한다. 최씨는 “일본의 시장 규모는 우리의 수십 배다. 만화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지하철에서 스스럼없이 만화를 보는 나라와, 청소년보호법이라는 미명 아래 서점에서 만화를 몰아낸 한국과는 애초부터 경쟁이 될 수 없다. 경쟁이 아닌 공존을 꾀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기는 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결론이다. 비단 순정 만화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도 살아 남았기 때문이란다. “걸핏하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범으로 뭇매를 맞고, 해적판 일본 만화와 싸우면서 다진 들풀 같은 생명력을 믿는다.”

魯順同 기자 

 [시사저널, 512호] 1999년 08월 19일 (목)

이미지 맵

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Focus/촌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