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박석환의 만화요만화, 1998-10-07 게재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박석환의 만화요만화]
단편만화
미국·유럽만화 40쪽 내외 일색/양보다 작품성으로 승부해야
최근 한 출판사가 4대 문학상 수상작들을 연도별로 한권에 묶어 출간했다가 소송에 휘말렸다.신흥 출판사의 재치있는 기획이었으나 문학상을 주관해온 출판사들과 협의가 없었던 탓에 적법성 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4대 문학상은 그 권위만큼 장사도 잘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혹자는 이를 ‘잘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다.주관사에서는 수상선정단을 구성하고 한해 최고의 작품들을 선별,수상 혹은 수상 후보작들을 책으로 묶어낸다.독자는 그 한권을 읽는 것으로 문학계의 최근 창작 경향을 섭렵한 듯 우쭐해진다.잘 팔릴만한 기획출판물이다.장편만화가 주종을 이루고,조금 뜬 작품들은 20권이 넘어가는 만화의 독자들에게는 부러운 책이기도 하다.
미국,유럽 등지의 만화는 40쪽 내외의 단편 일색이다.까닭은 일본과 우리의 만화보다 설명적이고 화면 전개가 느리기 때문이다.그러나 설명적인 그림칸과 말칸 처리는 만화의 함축성과 작품성을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지난해 만화평론가들에 의해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이희재의 ‘간판스타’,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박재동의 ‘목긴 사나이’ 등이 단편만화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순정만화로 독자들이 몰리는 이유 중 하나도 단편만화의 매력 때문이다.장편만화가 잡지연재 도중 쉽게 인기에 영합하는 작품으로 변질되는데 반해 단편만화는 작가의 주관적 작업이 가능하고 작품 성취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만화시장의 특성과 독자들의 성향은 질보다 양 우선의 창작을 선호한다.잡지 판매를 위해선 인기연재물이 필수적이고 작가 입장에서는 한번 성공한 캐릭터를 버리기가 쉽지 않다.마니아를 자부하는 몇몇 독자들을 제외하면 만화는 여전히 킬링타임용으로 읽힌다.그야말로 시간을 죽여주는 분량을 원하는 것이다.
한 젊은 만화가는 “한두권짜리 작품이 서가에 꽂히면 독자에게 눈길 한번 받기 힘들다”고 말한다.그러나 이 역시 만화를 상품처럼 찍어내는 자의 투정에 불과하다.A5판형의 일반적인 만화책은 서점 진열이 되는 경우가 없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은 책들에는 대접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최근 출간된 프랑스만화 ‘죽음의 행군’은 고급 단편만화에 목말라하는 독자들의 요구와 적절히 호응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순정만화에 불고 있는 단편집 출간 붐도 한 예가 된다.최인선의 ‘속보이는 놈’,문흥미의 ‘디스’,함형숙의 ‘파사’,김우현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우화’ 등의 작품은 케케묵은 장편만화들의 이야기 늘리기와 TV연속극 같은 신경전에서 벗어난다.실험적이고 우화적인 소재선정과 회화성 높은 장면연출은 우리 만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조롱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이제 작품성을 인정받은 단편만화들이 4대문학상의 경우처럼 한권 안에 모두 모이는 일도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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