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1997년 한국 만화계 결산, 코코리뉴스레터, 1998

 


정리 1/ 97년 만화는 무엇이었나?


그 치욕스런 한철을 보내고 다시 새해를 맞게 된 만화는 수호천사처럼 따라붙던 신문-일개 언론인이나 문필가들을 통해 여전히 '만화 같은...'따위로 비하되고 있고, 정부의 '전쟁선포'에 폐허가 됐던 전사(?)들은 알량한 만화 육성책에 감격스런 인사말을 던지느라 여념이 없다. 애니의 거품을 속내로 지닌 대학들이 만화전문과정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더니 이제 고등학교까지 이에 편승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긴 하나 홍대 앞을 꽉 메우고 있는 미술학원 처럼 만화학원이 급증 엘리트 예능주의의 한 분야로 파생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앞선다. 우리만화의 전체 또는 한 틀이었고 만화를 회상하는 모든 이들의 성전이기도 한 '만화방' 역시 '책대여점'이라는 변종의 장사치들에 의해 위기국면에 놓였다가, 잡지만화와의 집안싸움이 거세지면서 전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경이다. 만화방에 어린이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래 전 공포된 사실이지만 작품 내적인 것들-볼 수 있는 것을 친절하게 구분지어주는 잣대에 의하면 너무도 유해한 내용들이 즐비한 성인용 만화-과는 상관없이 외적으론 어린이용 만화로 출간되고 있다. 잡지만화 역시 출간물의 연령 구분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혼재하고 있어 적당한 어린이용 출간물이 없다. 하지만 만화는 아직도 발전하고 있고, 성장을 늦추지도 않았다. 다종다양한 작품군들이 제시되고 있고 젊은 작가층의 활발한 문제제기 역시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얼만큼의 영향력을 등에 없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정리 2/만화가 원하는 것들은?


97 년 우리 만화계의 창작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드래곤볼, 씨티헌터, 북두의 권, 란마1/2, 슬램덩크, 캠퍼스블루스로 이어지는 일본만화의 베스트계보를 통한 만화문법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컷의 연결과 장(페이지)의 이동으로 이루 어지는 우리 만화의 특성이 전시적인 것과 동영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고, 셋째로 순정과 환타지물이 독특한 장르만화로 자리 매김 했다는 것이다.

90 년대 들어 일본만화의 베스트 계보가 우리 출판만화시장의 한 축으로 존재하게 되고, 일본만화전문지의 편집 및 운영체제를 유입한 상업지들이 생겨났다. 상업지들에 의해 일련의 인지-숙련과정을 겪은 우리작가들이 비슷한 유형의 만화를 생산해냈고, 올해 들어 그 숙련도가 정점에 달하게 된 것이다. 앞서 기술한 일본만화 중 드래곤볼, 북두의권, 슬램덩크는 무한경쟁을 통한 네러티브의 전개를 한 축으로 하는 주간지체제에서의 작품 전형을 만들어냈다. 이는 우리만화의 전개방식중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잡았고, 이와 함께 1인 영웅물이 주류를 이루던 창작성향에서 탈피 독특한 개성을 가진 다수의 영웅을 전면에 등장하게 하는 전략도 구사하게 됐다. 씨티헌터의 통속적인 인물설정 방식과 남녀간의 사랑표현에 대한 만화적 해석도 아직 유효하다. 호색의 전능한 능력 소유자와 과격한 여자와의 연애심리는 다양하게 줄거리상의 변화를 겪으며 활용됐다. 또 한때 나라 전체를 휩쓸어버렸던 '일진회 사건'의 원죄지가 되었던 캠퍼스블루스역시 착실하게 응용되어져 학원폭력 만화의 위대한 전승지가 됐다. 양성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여 다다미계 만화-특정 가정에서 펼쳐지는 잡다한 이야기들-와 양성애에 대한 은유가 그득한 란마1/2도 내용전개의 방법론으로 쓰여졌다. 그밖에 오렌지로드, 비디오걸등을 통해 드러나는 나약한 사춘의 소년과 세상경험(?) 많고, 이해심 많은 소녀와의 사랑, 또는 내밀한 감정의 치열한 묘사 역시 우리 만화 주인공들의 성격 창출에 차용됐다.

SICAF 라는 전시행사의 성공 역시 만화창작 환경의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차원적인 전시형태는 쉽게 탈피되어지기 시작했고, 패널 형태의 유리관 속에 갇혀있던 '만화'는 책 속에서 밖으로 빠져 나온 것과 같이 평면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변화됐다. 소위 '설치만화'를 한다는 몇몇 비주류 작가들 사이에서 이벤트적인 것으로 활용되어지던 것이 수차례에 걸친 전시행사와 패스티벌을 통해 일반에 알려졌고, 나름의 인증표를 지니고 '만화적인 행동'까지를 '만화'라는 매체의 범주 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이와 함께 '카툰'의 형식적인 측면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전시용(?)작품들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춘천만화축제시 선보였던 '듣는 만화''만지는 만화'등도 새로운 형식의 전시만화를 만들어냈다. 인쇄기술의 고급화와 디자인의 개념확장, 일반의 심미적 인식 성장 등은 일러스트와 만화의 경계를 허물어지게 했다. 독자사은용 정도에 불과했던 일러스트가 독립적인 형식과 이야기를 지니며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외양을 지니게 된 것이다. 순정전문지들 정도에 국한됐던 칼라지면을 통한 일러스트와 화보성 CG들이 작품 안으로 깊숙이 진입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만화인들 사이에서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최후 목적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도 올해의 경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외양적인 기대심리의 확장은 결국 기존의 만화문법까지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CG의 활용은 손맛에 천착해있던 우리만화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긴 했으나 프로그램과 소스 등의 제한적인 사용은 점차로 차별성이 없어지게 했고, 컷과 컷의 흐름 단과 단의 연계 등에서 연출의 기본 틀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장면의 흐름을 이끌어내기 위해 제시되었던 다음 상황으로의 전환은 극도로 자제 또는 텍스트 안으로 밀어 넣어버렸고, 효과적인 그림연출에만 작가의 의지가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효과선의 사용 등 만화적인 표현수단 역시 일러스트나 CG안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또는 일러스트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서 네러티브의 전개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경향은 에세이류의 만화가 극히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정리3/ 왜 탈피하려고만 하는가?


앞서 열거한 흐름들은 우리만화에 최근 일고있는 독특한 성향과 연계하며 하나로 표현됐다. 그간 비주류 만화로 열거되며 소외당하던 일련의 작품들이 또렷한 징후를 보이며 다음 세대의 작품형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순정만화라는 극히 편협한 장르용어로 불려지고 있는 이들 작품군의 재활은 기실 한국의 만화 토양이 얼마나 척박한가를 반증하고 있다. 세기말로 치닫는 문화전반이 유미주의적인 퇴폐성과 악마주의를 간절히 원하고 있을지라도 이들의 복권은 일본만화의 아류로서 기생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순정의 등극이 일본소녀만화의 계보를 따르고 있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80년대 이후로 우리만화는 자생의 의지를 펼쳤고, 새로운 경향의 만화작업으로 그나마의 면죄부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다음세대를 연결하는 지망생들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교육 기회를 일본에 넘겨 버렸다. 현재 작가 진들은 일본의 사이버펑크 계열의 만화를 열독하고 이를 지침으로 창작토대를 마련했다. 80년대 중반 일본만화는 거대로봇의 유행에서 탈피한 메카닉 연출을 위해 가는 선의 사용범주를 확장했고, 인물 선을 간결하게 이끌어갔다. 이에 적용된 것이 소녀만화의 계보 안에 있던 작화법이었다. 극화가 장르혼합을 통해 새로운 만화작법을 일궈놓았으나 이를 통해 그림과 일치하는 극의 전개를 이끈 것은 순정작가 진영이었다. 이들은 스피드한 극의 연계보다 장엄하고, 소소한 연출을 통해 만화의 재미를 만들어냈다. 감성의 작용을 주로하는 이들의 작품성향은 세기말의 문화적 코드와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신 세기, 독자의 갈망은 불확실한 공간과 장소로 만화의 상황을 변화시켰고, 절대절명의 위기감이나 초인적인 능력의 소유자들은 개인의 이익을 원하는 쪽으로 성장했다. 인간대 인간의 대결국면은 미지의 생명체 또는, 신 세기를 지배할 듯한 모종의 인종들로 대체됐고, 에너지와 자원의 고갈 등은 다시 칼과 무사를 이끌어내는 등 신화적 상상력의 부각을 낳았다.

 

정리4/ 다시


다시 정리하자면 올해 우리만화의 큰 흐름은 무협환타지, 학원만화, 전시만화 등이 기존의 만화영역과 혼재, 새로운 만화의 형식을 만들어냈고 작품성향으로 규결된다. 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들로 순정의 호러장르만화와 대하역사환타지만화, 동성애만화 등이 놓여있다. 여기에 점차 규모의 확장을 통해 영역 분할에 임하고 있는 독립만화집단의 창작성향도 나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명랑만화로 불리는 어린이 만화장르의 확연한 퇴보도 올해의 큰흐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짱구는 못 말려-어린이용으로 볼 순 없지만-가 우리시대의 아이콘으로 회자되고 있는 마당이지만 이 장르의 만화 중 올해 성공적인 모습을 보인 작품은 전무한 지경이다. 상업출판사측이 사익을 위해 잡지의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유아부터 10대 중후반까지를 포괄하는 내용의 간행물을 발간하면서 우리만화는 어린이 독자를 위한 만화가 사장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만화집단의 힘찬 발진은 연말 딱지라는 올 컬러 고급지의 발간을 통해 정점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욱 반가운 것은 이들 집단이 잃어버린 명랑만화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5/ 한소리, 공감 또는 


97 년 한국의 만화를 결산하고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마녀사냥'에 대해 격한 거부감을 나타내야하고, 천국의 신화가 매카시 열풍에 희생된 저주받은 걸작임을 인정해야하며, 성인의 볼 권리를 위해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견해다, 라고 말해야 한다. 거기에 만화는 현실을 투영하지 않고 '허구''제한된 유희'만을 가지며 만화적 상상력과 창작물은 현실에서 재생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해야한다. 한국의 만화는 상업적인 변모가 가능하고 다종다양의 산업적 쓰임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해야 되며, 애니메이션은 출판만화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고, 만화는 범위가 점차로 확대되어져 캐릭터, 애니메이션, 동영상 등의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해야한다. 그리고 또 말해야 한다. 아직도 우리에게 최고의 작품은 간판스타[1]이고, 이제 일본만화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열린 관계를 유지, 그들의 선진만화(?)를 학습[2]해야 한다고.

 

정리6/ 98년은 와버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김영삼이 주도한 문민시대의 우리만화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극한 경제빈곤현상에 따른 상업만화의 변화도 필요할 것이고, 문화개방기에 따른 경쟁력도 제고 되야 한다. 첨단산업시대의 문화 다매체현상에 따른 서책문화-만화책-의 형태변화에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또 와버린 98년을 기대하기만 해야 한다. 언제나처럼 멀건 눈으로 문화의 이면에 잔존하는 자로, 그렇게 자리해야한다. 찔리고 찔리다 터지면 광분이상의 분노를 피해의식으로 들어내면 된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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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11월 호가 국내 평론가 9인을 통해 선정한 13편의 작품 중 1위를 차지한 작품은 당연스럽게 이희재의 <간판스타>였다. 그들이 선정한 목록이 얼마나 만화적이지 못한지를 거론할 이유는 없다. 그들이 우리만화의 현재성을 간과하고 있는 현장평론가들이고, 민중문화운동 계열의 문필가들이라는 것에 새삼스런 의구심을 일으킬 이유 역시 없다. 하지만 왜 이다지 일편향적이고 제한적으로 만화를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풀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무엇 때문에 연대하는가?

[2] 만화라는 매체를 활용한 스펙터클한 전시회가 연례행사처럼 진행되면서 메이저출판사들의 역할이 대외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만화이론가들과 평론가들마저도 그들의 정치적(?) 도움으로 창작영역을 제공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한다. 출판시장의 개방은 일본만화의 라이센스판 또는 무단복제판을 단행본으로 판매하는 상업출판사들에 빅뱅 이상의 경제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다. 그렇다면 말해야 한다. 일본만화개방 결사반대라고. 하지만 결사반대를 지지하는 이론가들도 일본의 우수한 만화를 발굴 소개하는 등의 양면성을 띄고 있다.



한국만화문화연구원코코리뉴스레터1998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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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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