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게 달려오지 않더라도
그대 이제 어디로 달려가는가 - 《히스테리》 2호에 관하여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한국만화문화연구원(원장 손상익)의 기관지 《코코리 뉴스레터》 3호에 《히스테리》 창간호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졸고 ‘히스테리 일으키는 히스테리’에 대한 일반의 평가는 필자가 서술했던 사항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의중과는 상이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근간에 가졌던 히스테리 편집진과의 대화 중에도 그와 비슷한 오도의 언사를 직면했고, 만화에 대한 매도와 같은, 만화평론에 대한 매도에 흐려지는 심기를 느꼈다. 그리고 본 잡지 2호에서 만화가 박연이 언급한데로 극심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이기적이며 냉정...’한 그들의 뽐새를 다시 한번 주시해야 했고, 그것이 ‘창조성과 깨어있음과 당당함과 지적 우월성...’에 의한 것인지 의심해봤다.
“어떤 책도 만족 시켜 주지 못하는 그 무엇을 찾아
네가 하염없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는 밤,
그래도 가슴 설레이며 그 무엇을 기다리는 밤,
마침내 너의 정열이 덧없어 서글퍼지는 밤,
바로 그 시간에 나는 네게로 달려가마.”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을 통해 서술한 이 문구는 《만화실험 봄》을 통해 신일섭 등을 목도하고, 중독되지 않을 만큼의 사랑과 공감을 표했던 필자에게, 그들의 환영이 건낸 말과 같았다. 《히스테리》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네게로 달려가마’라고 말해왔던 환영의 존재감은 보다 확실한 형상이 됐다. 이에 출간기념회장으로 달려갔던 필자는 그들을 확인하고 즐거워했으나 ‘너의 정열이 덧없어 서글퍼지는 밤’을 확인해야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만화’, ‘작가주의 만화’라는 것이 필자의 입장과 다른 것일 순 있겠으나 ‘기존의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문맥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이었다.
《히스테리》 대 《히스테리》
기존 상업만화의 폐해를 지적하며 작가주의 만화를 표방하고 나선 《히스테리》. 창간호는 오영진, 김동고, 노미후의 작품을 통해 우리만화의 부패한 현실을 지적하고, 다른 움직임을 일깨우려는 의도를 보였다. 오세욱, 강성수, 신일섭, 정의천의 작품을 내밀며 실험만화의 한 국면을 제시했다. 하지만 다 채우지 못하는 열망에 대한 부분은 이희재와 데이빗 호크니에게 전가시키고 만다. 2호에서 그들의 관심은 우리 만화판의 화두처럼 인식되는 표절논의에 있었으나 특집기사 안에서 적당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만화산업인들과 작가, 독자의 성숙만을 기대한다.
만화 작품으로는 기존의 오영진, 강성수, 오세욱과 서범강, 이경석, 고민수, 강병호, 송동근이라는 새로운 작가가 참여해서 모두 9편의 단편만화를 선보였다. 일상과 환타지라는 국면을 제시하며 문법화 되어질지 모를 히스테리적 실험만화를 발표했다. 특집과는 달리 일정한 컨셉트 없이 무작위로 개재한 듯한 단편만화들은 일상의 괴리에서 오는 부조리와 역설의 파라독스를 보여줬다.
히스테리적 만화문법
작가의 생명연장을 위해선 필요 불가결하게 장편 또는, 연재만화를 발표해야 하는 것이 우리만화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히스테리》의 단편들은 보배와도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일반에게도 보배로울지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만화가 장르로서 대중성을 지니게 될 수 있었던 건 그 어떤 영상창작물보다 확연한 내러티브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작품구성시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반복되는 정서표출로 드러난다.
가령 박봉성 만화의 경우 주인공의 응집된 한을 통해 상대자와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복수의 내러티브를 전개해낸다. 주인공의 눈빛은 언제나 억압받았던 기억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린다. 박봉성은 작품 안에 수없이 많은 사건을 만들어 분노로 점철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작 50권을 읽어도 힘들지 않게. 다음 권을 들면 새로이 펼쳐지는 얘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지만 조금 다른 것들이 굴비 엮든 늘어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히스테리》의 단편들은 그럴만한 호흡법을 알지 못한다. 지면도 한정 되어있다. 어쩔 수 없이 단편작업을 지속시킬 수밖에 없다. 단 한 컷의 의미라도 읽어내지 못하면 작품의 앞뒤가 흐트러져버리는 것이 《히스테리》적 단편만화이다.
거기에 작품간의 연계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앞서 기술한 대로 창간호에서 작품간의 연계성(두 축으로 구분되는)이 《히스테리》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보였다면, 2호에서는 일상과 환타지가 그 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큰 폭의 소재들과 주관적 견해(?)의 나열이 히스테리 독법에 난항을 부여한다.
오영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백수라는 주인공의 입사시험을 통해 소외, 또는 소멸되는 현대인의 정체성과 상념을 세 개, 또는 네 개의 시간축 위에 전개한다. 사회에 대한 회의를 지닌 채 술에 취한 백수는 암사동에서 길을 잃고, 석기 시대에 와있다. 자신의 아이콘인 표범이 힘의 논리 앞에 죽어지는 것을 목격한 백수는, 원시부족사회에서도 버림을 받는다. 모권이 강한 부인에 의해 구원을 받은 백수는 현실계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예언을 남긴다. 프로필을 남기기 전에 공룡의 변(便)에 의해 컷으로부터 이탈 당한 백수는, 근 미래 또는 다른 현실계에서도 낙오자의 형상으로 힘겹게 걸어간다. 모계질서를 지닌 원시가정이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 그려지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보이고자 하는 바가 두 개 또는 세 개의 것으로 확연하지 못하다.
송동근의 『日生』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주인공의 반복되는 하루를 고즈넉한 컷들의 연결로 잔잔하게 형상화해낸다. 동공에 자리한 모니터 속의 경직된 자신을 발견한 주인공은 작은 이탈을 계획한다. 그가 위험스럽게 착지한 피신처는 그의 동료들이 이미 와있는 흡연구역이었다. 바이어와의 협상에 실패한 팀장 역시 그들의 피신처로 들어서다 주인공을 목격한다. 주인공의 오류로 인해 결렬된 거래. 팀장은 원숭이처럼 유난을 떤다. 시간은 흐르고 주인공의 다른 인격인 하드디스크의 전원이 꺼진다. 익숙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똑같은 치기와 회의들이 들먹여진다. 전봇대 아래서의 구토가 행해지고, 두축으로 나뉜 등장인물들은 자전거 체인 안 쪽에 위치한 톱니가 된다. 언제고 같은 일상을 맞이하는 이들이 된다. 송동근의 만화는 그림데생에서 오세영 류의 표현들이 녹아있으나, 미디엄 쇼트를 통한 그림연출과 컷 분할 등에서 실력을 가늠하게 한다.
오세욱의 『만화가 구보씨의 나른한 오후』는 만화가인 작중 주인공의 나른한 오후에 대한 백일몽과 코딱지 후비기라는 여유의 종결에서, 자체적 당위성 찾기와 현실부정 의지를 설파한다. 당위의 현실화에 대한 노력으로 기울어진 하루에 극심한 허기를 느낀 주인공은 책을 맛있게 먹어댄다. 어느 날부터 사람을 벗어나면 외롭지 않은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창작연도를 93년이라 적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가 『주간만화』를 통해 데뷔하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는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 역시 당시의 화법을 재사용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오세욱 만화의 미덕은 다름에 연유하는 것이다. 특유의 폭넓은 붓터치와 화폭은 깊은 매력을 발산된다. 하지만 변화를 보는 즐거움 중에 들어서 있는 것이 오세욱의 화풍이라면 이젠 다른 그림을 보여야 할 때이기도 하다.
서범강은 비교와 대조라는 극렬한 연출법으로 『신호등과 그녀』와 『변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히스테리》에선 일상화 된 붓터치가 작품의 경중을 담는다.
고민수의 『칼』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상습폭력에 시달린다. 어머니를 향한 폭행과 방랑력에 정신적 압박을 지니게 된 주인공은 아버지가 칼이 되어 자신과 어머니의 살을 깎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주인공은 십 몇 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고, 사라졌던 칼이 다시 주변에 나타나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를 만나는 중에도 칼은 나타나 살을 베어 낸다.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인공의 살은 칼에 의해 베어지고, 잘려진다. 주인공이 아버지를 부정 할 때마다 칼은 등장하지만 보다 강력한 대응자세를 취하면 도망가 버린다. 칼은 어김없이 그의 속마음을 따라 나타나고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주인공은 칼과의 정면대응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는 칼에 베이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스스로 칼을 들어 자해한다. 손목에 붕대를 감은 주인공은 다시는 칼에 베이지 않을 자신감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상실된 부권을 소생시켜낸다. 히스테리적 스토리와 망가풍 데생, 미숙한 만화 같은 연출이 범벅 됐다.
강성수는 『느린걸음』을 통해 어머니라는 단어가 상실된 암울한 미래사회를 조망해낸다. 남성지배사회에서 사장 된 어머니의 역할은 박물관에 안치되었고, 박제화 된 이력에 아이는 태생을 잊어버렸지만 개의치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 인식조차 배재되었음으로. 강성수는 주인공을 마지막 컷으로 이끌면서 ‘졸립지 않니?’라고 묻게 한다. 그가 잠이 오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잠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어느 곳일까? 또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독자는 많은 물음표만을 끌어안게 한 강성수의 수상록을 접한다.
새로운 형식을 통한 저급문화의 대안적 요체로서 전폭적인 지지국면을 확보한 것이 《히스테리》의 무게이다. 뒤바꿔놓기 좋아하는 언론의 지대한 관심과 만화에 대한 재인식과정에서 적절하게 외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만화계 자체적으로도 자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을 즈음이라 젊은 호기에 너그럽게 응대하고 있다. 하지만 적당하지 못한 행동철학과 일편향적인 노선을 고집하며, 열망만으로 구성되어있는 《히스테리》는 대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저변에서의 행세함을 돕기 위해 대중은 지지자를 선정하지 않는다. 작가는 완성된 원고를 보지만, 독자는 원고 내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험한다. 작가는 내용을 두고 그림을 그리지만, 독자는 그림을 보고 내용을 쫓다가, 종국엔 자기인식과의 합의요소를 찾아 꿈꾸기를 즐긴다. 꿈꾸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독자에게 재 만족을 일궈내는 것이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평가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것이 요원하지 못할 때, 독자는 돛대도 삿대도 없는 배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극심한 공포를 유발할 땐, 차라리 내려버리길 갈망하는 것이다.
때로 독자는 훈련받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 만화계는 작가의 독자훈련에 대한 노력이 전무한 지경이며, 히스테리的 만화문법에 관한 대상독자의 이해도 역시 일천한 수준이다. 히스테리的 만화에 대한 인식이 장르화 되어지길 원한다면 독자에게 적당한 수련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 방법 역시 다채로운 실험일수 있을 것이다. 그림형식의 실험을 원한다면 내용 이해가 용이한 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도출되는 문제는 일반적인 작화법에 대한 이해를 가진 작가가 《히스테리》 내에는 드문 지경이고, 기존작가 진영의 참여도 단절 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가 밖에 나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탈출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방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적어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은 생길텐데”
앙드레 지드/ 『팔뤼드』 중
《히스테리》는 대한민국 만화계의 화두를 표절이라 정하고 특집기사를 수록하고 있지만, 그 기간에 필자가 정한 화두는 《히스테리》였다. 그리고 창간호를 직면한 뒤로는 《히스테리》적 히스테리에 대한 고뇌로 탈바꿈했다. 만화계 일각에서도 그들이 불러내는 히스테리에 오감을 곤두세우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어떤 만화인들도 그들의 적으로서 나서진 않을 것이다. 《히스테리》는 외부의 적과 맞서려는 의지를 버려야 한다. 전투의지로 상처받고, 폭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만화는 개인소장용이기 쉽다. 독자를 지향하는 특화성(히스테리的)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히스테리》의 요체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를 일구기 위해선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과 보다 치열한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네가 달려오지 않더라도
《히스테리》는 실험성 강한 대중문화를 지향하며 종합예술로서의 만화답게 예술전반을 다루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을 위한 과도한 지면할당은 의아심만을 배가시킨다. 거기에 공표만하고 한줄 적어 내지도 못한 ‘예술전반’은 어쩌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건 겨우 2회를 맞이하고 3회가 계획됐다는 것이다. 이 정도가 벅찬 기쁨인 것이 우리만화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분투는 놀랍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 집단을 긍정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포기하지 않을 만큼, 그들이 포기하지 않을 만큼 쫓아다니면서 비(悲)웃을 것이다. 어느 핸가 비(悲)자를 제하고 웃을 수 있을 때가 되길 빌겠다.
“빛이 유황에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들의 행동은 우리들에게 연결 되어있다.
그것이 우리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또한 우리들의 광휘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넋에 무슨 가치가 있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넋들보다
더 치열하게 탔기 때문인 것이다.”
앙드레 지드/지상의 양식 중
(끝)
히스테리, 모던코믹스봄, 1997. 07 발표
박석환, 만화시비탕탕탕, 초록배매직스, 1999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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