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다른 만화에 대한 갈증-그래픽노블을 소환하다, 파출소, 2021 가을호

2020년 뉴육타임즈 선정 그래픽노블 10선

 

돌아온 그래픽노블의 세계

지난 3월 인터넷서점 예스24는 자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화’ 카테고리의 출판 및 판매 동향을 분석해 발표했다. 요점은 만화 카테고리 내 22개 분류 중 하나인 ‘그래픽노블’의 생산과 소비가 확대되면서 ‘만화 분야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는 취지였다. 예스24는 그래픽노블이 지난 10년 사이(2020년 기준, 2010년 대비) 출간 종수는 4배(37권→140권) 가량 늘었고 판매량은 7배 증가했다고 했다. 더불어 기존 만화 카테고리의 주 구매자가 20~40대 남성(42%)이었다면 그래픽노블은 20~40대 여성(53.2%)이라고 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조금은 아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출간량이 4배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140권을 많다고 할 수 없다. 7배 늘었다는 판매량의 지표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매층의 성비가 변하고 일부 연령층에 집중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의문이다. 새로운 작가의 등장, 새로운 작품군의 형성, 새로운 출판 형태의 제시, 새로운 소비자의 참여와 응원은 환영할 일이다.

통상 그래픽노블이라고 하면 미국의 만화가 윌 아이스너(Will Eisner)가 1978년 《신과의 계약 A Contract With God》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만화계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슈퍼히어로 중심의 코믹북에 비해 작화의 완성도와 내용의 완결성을 높여서 만화 형식 자체와 독자층을 한 단계 성숙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용어이다. 현재 기준에서는 작화적 측면보다는 ‘내용의 완결성’에 더 집중된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코믹북 산업의 상업성에 저항했던 그래픽노블

미국의 코믹북은 시사주간지와 같은 판형과 얇은 용지에 32페이지 분량으로 올 컬러 중철 제본되는 형식을 취한다. 이 분량에 맞춰서 특정 영웅 캐릭터 중심의 짧은 이야기가 게재되기도 하고 하나의 줄거리를 지닌 내용이 여러 회에 걸쳐서 분할 게재되기도 한다. 이때 각 권을 이슈라 칭하고 여러 이슈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줄거리 구조를 이루고 있을 때 이를 ‘스토리 아크(Story Arc)’라 한다. 미국의 코믹북 산업은 이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했고 이를 조금씩 또는 혁신적으로 변형하면서 발전했다.

CBR에 소개된 미국의 코믹북 매장 

새로운 볼거리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기 위해 가장 싼 컬러 인쇄 방식과 용지를 택했고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지속적으로 구매하도록 특정 캐릭터 중심의 에피소드를 쪼개서 정기 발행했다. 가판(Kiosk) 중심의 독립 유통망을 만들기도 했고 판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한정 수량만 생산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규격화됐고 대량생산과 대량판매를 위한 구조로 체계화됐다. 누가 그려도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은 정해진 부수가 판매됐고 열과 성을 다해도 작가에게 추가 수입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생산량과 판매량은 유지됐지만 작품의 질은 떨어졌다.

이 시기 만화가들은 컨베이어벨트 앞에 앉아 반복적인 작업을 하는 기능공 같았다. 어떤 작가는 거기서도 최고의 장인 역할을 했고 어떤 이는 작업대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길을 열었다. 코믹북의 아버지로 불리는 잭 커비와 스탠 리가 불세출의 장인이었다면 윌 아이스너는 코믹북 산업의 체계를 전면 부정한 반동 세력이었다.

윌 아이스너가 제시한 ‘그래픽노블’은 슈퍼히어로 중심의 코믹북과는 정반대였다. 히어로 캐릭터 시스템을 거부하자 캐릭터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사건 중심 서사가 전개됐고 사건에 맞는 인물이 등장했다. 인물이 바뀌자 이야기의 무대와 인물 간 갈등의 구조, 문제해결 방식 등의 깊이도 달라졌다. 에피소드 중심의 얇고 싼 형식도 거부했다. 한 권에 완결된 이야기를 담자니 분량은 두꺼워졌고 책값은 비싸졌다. 가격에 맞춰 용지와 제본이 고급화됐고 비싼 책값을 지불할 수 있는 소비자층에 맞춰 내용과 마케팅 방식도 변화됐다.

 

주류 장르에 대한 염증이 그래픽노블을 재소환해

 

윌아이스너

 

윌 아이스너가 제시한 그래픽노블은 탈(脫) 코믹북 형식을 취했고 다양한 창작자들의 동조를 이끌어냈다. 거기에는 코믹북 산업 내부의 작가와 출판사도 포함됐다. 마블 코믹스는 1982년 마블 그래픽노블(MGN) 라인을 발행했다. 이후 히어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스타시스템은 유지됐지만 드로잉과 컬러의 수준이 격상됐다. 에피소드 중심의 이슈 발행을 계속했지만 스토리 아크를 한 권에 묶어 하드커버 장정으로 재출판했다. 코믹북 산업에 반대하며 등장한 그래픽노블이 코믹북 산업 내부를 변화시킨 것이다.

현재 그래픽노블은 두 가지 분야의 만화출판물을 통칭하는 용어가 됐다. 하나는 기존의 상업 만화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이른바 문예 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상업 만화를 전략적으로 고급화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래픽노블에 대한 관심이 아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출판 만화의 속성상 시장이 좋을 때는 대량 생산, 저가 판매 전략이 주효하다. 반면, 시장이 어려울 때는 소량 생산, 고가 판매 전략을 택한다. 소비층이 제한적이라는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만화 시장에서 그래픽노블이 주목될 때는 역설적으로 주류 만화 시장에 대한 염증이 뭔가 ‘다른 만화’에 대한 생산과 소비 욕구를 증가시킬 때이다. 즉, 만화산업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래픽노블이 소환된다는 의미이다.

한국 만화산업의 주류 장르는 웹툰이다. 네이버 웹툰에만 1주일에 480여 편의 작품이 연재된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네이버 웹툰의 월간 사용자는 1억 6700만 명이다. 이곳에서 창작자들은 지난 1년간 1조 7백억 원을 벌었고 최대 수익을 올린 작가는 124억 원이라고 한다. 전체 작가들은 연평균 2억 8천만 원을 벌었고 새로 연재를 시작한 경우도 이를 연간으로 환산하면 1억 5천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놀라운 수치다. 네이버 웹툰이 국내를 기반으로 글로벌 소비 시장을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규모일 것이다. 반면, 과거 만화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출판만화 시장은 상대적으로 위축됐다. 그래픽노블의 재소환은 어찌 보면 위축된 출판만화 시장을 살리기 위한 만화출판인들의 고육지책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출판물이 판매되고 소비량이 증가한다는 것은 지금 이곳의 주류 만화 시장에 대해 의문을 지닌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자 신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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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호] 특집 - 다른 만화에 대한..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2021 가을호] 특집 - 다른 만화에 대한 갈증, 그래픽노블을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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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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