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평론가 박석환의 응답하라 1994, 2013.12.14

 

tvN에서 하는 [응답하라 1994]의 인기가 하루가 다르게 증폭되는 것 같다.  

 

모처럼 페이스북에 들렀더니 한 페친님께서 본인의 1994년을 공개했다. 

 

그래서 진도 안나가는 연구용역 작업을 잠깐 중지하고 추억찾기에 돌입해봤다. 

 

 

나의 1994년은 어땠을까??? 

 

그러고 보니 ... 나는 93년 11월 군번...   

 

나의 94년은 그냥  같은 냄새나는 머리 짧은 인간들과 일어났다 자고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쩝...

 

그래도 뭔가 위아래로 추억 넘치는 일들이 있지 않았을까???

 

앨범을 뒤지다보니 쫌 싸가지 없어 보이는 인물 포착.

 

 

 

88올림픽 때 중3이었다. 

 

많은 것이 자유(?)로워 지려했었고 그렇게 보이려했던 시절.  

 

내가 보던 잡지는 '아이큐점프' 창간호가 아니라  '만화광장'과 '주간만화'였다.   

 

동아기획에서 나오는 카셋트 테잎을 모으고 있었다. 신촌블루스 시절의 김현식을 좋아했다.

 

한영애, 정경화 같은 여성보컬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범우사 문고 시리즈와 영화잡지 키노를 열심히 읽었다.  

 

크리스찬 슐레이터가 나왔던 영화 볼륨을 높여라를 좋아했다.  

 

 

 

잠실고등학교를 다녔으니 당시 우리의 아지트는 롯데월드 분수대 앞이었다.  

 

춤 좀 춘다하는 아해들이 깡총거리고 다녔는데...  

 

그 곳에서 박진영, 문희준 같은 선수들이 나왔다.  

 

이웃한 강나루에서는 배용준, 이병헌 같은 선배들이 놀았다. 

 

아이들은 현진영, 듀스를 들으며 깡총거렸다.

 

나의 마음 너의 마음 울렁울렁 두근두근 쿵쿵

 

 

 

몇몇 애들은 브리티시락과 메틀사운드에 빠져있기도 했다.  

 

난 레드제플린을 좋아했고 본조비 정도를 소화했다.    

 

이 때 학교는 동물의 왕국이었다.  

 

이웃한 여학교는 속물의 왕국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님기 위해서는 뭐든지 큰 것처럼 보여야 했다. 

 

눈에 힘주고 목소리 볼륨은 키우고 신발굽은 높이고  

 

움직임도 크게 크게 했다. 

 

아래사진은 창작 좀 해보겠다고 석촌호수를 배회하던 시절이다.  

 

 

 

눈에 힘이 많이 풀렸다.  

 

2, 3학년 되고보니 동물의 왕국은 뭐 그냥 양어장 같은 느낌이었다.  

 

먹이주면 우르르 몰려다니다 마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쯤이다.  

 

이 때 처음 만화가 화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잠실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1시간30분 가량을 가야했던 화실에서 방학기간 동안 뒷처리 일을 하며 눈동냥, 귀동냥으로 만화를 배웠다. 선긋기, 먹칠, 점찍기, 피스질, 지우개질. ... 정말 많이 했다.  

 

공부 빼고는 다 자신있었다. 시간 많은 고교생이었으니까.  

 

축제 때면 문예반과 미술반의 객원 멤버로 활동하며 전천후 창작인(?)의 소양을 보이기도 했다.  

 

왕가위 영화를 좋아했고 유하의 시와 장정일의 삶을 동경했다.  

 

압구정동에 간 것은 아니었고 

 

대입 시험을 보지 않았다.  

 

 

 

 

공부도 못했지만 이미 만화를 그리면서 돈을 벌고 있었고 그 생활이 즐거웠다.  

 

아버지가 빌려주신 상가에 화실을 차리고 만화하는 친구들과 엉터리 창작에 매달렸다.  

 

그 덕에 독서실 가야할 시간에 화실 문을 두드리는 수많은 고3 좀비들을 만나야 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렇게 고교생에서 바로 군인이 됐다.

 

93년 11월 군에 입대하고 94년 첫 일병 휴가를 나왔다.

 

그리고 고3 때 만나서 나의 방황을 지켜봤던 그 녀. 

 

군대 갈 때 부모님 옆에서 눈치보며 울었던 그 녀.

 

그녀가 군인이 된 나를 기다려 주고 안아줬다.

 

 

 

늘 롯데월드 분수대 근처에서만 놀던 우리는 그날 놀이공원에 갔다.  

 

그녀는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다녔다.

 

나는 오규원 시인을 좋아했는데 그녀의 은사님이었다.

 

그녀는 최승자, 김혜순 시인을 좋아했다.   

 

우린 늘 글을 썼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늘 서로의 글을 탐했었다.   

 

 

 

군에서도 만화를 그렸다. 내내 그렸던 것은 아니지만 '만화병'이라 불렸다.  

 

이등병 때 훈련나가지 말고 포스터 한장 그려내라는 소대장의 명에 따랐더니 

 

얼마 후 자동차 한 대가 와서는 나를 태우고 사단본부에 내려줬다.  

 

아주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책 읽고 글쓰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업무용PC도 있었던 터라 글쓰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 만화를 그리기는 여의치 안았다.

 

아무래도 눈에 띄는 작업이다보니 펼쳐놓고 뭔가 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상병 휴가를 나왔을 때 그녀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건모 노래가 유행하던 그 시절. 노래 가사 처럼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적당한 '핑계'도 없었고 그저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만 알아들었다.

 

 

 

어떻게 복귀해서 뭐하면서 그 시절을 넘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사나워져야 하는 상병 생활. 가장 무섭게 보여야 하는 그 때 나는 도무지 무서워 질 수가 없었다.

 

눈에도 입에도 손에도 발에도 힘이 없었다. 덕분에 내가 상병이 되고 '마대'라는 직책을 받았을 때 우리 내무반은 가장 살기 좋은 부대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구타가 없는 내무반이라는 이유로.

 

그 때쯤이었다.

 

병사들을 데리고 사단 연병장 잔디를 깍고 있을 때 비상 사이렌이 울리며 소집명령이 떨어졌다.

 

김일성이 사망했다.

 

아... 어쩔거나. 사랑도 잃고 주적도 잃고... 남북은 휴전이후 최고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별일 없을거야라고들 했지만 북한의 움직임은 예측불가능한 것이었고 군대는 상당기간동안 비상사태를 유지했다.

 

거기다 윗 기수들이 파견을 가고 파견지에서 제대를 하게 되면서 상병 말호봉 때 분대장을 달게 됐다.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말없이 마대질을 하던 상병이 분대장이 되었으니 이 또한 가관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끄적이고 있고 점호를 할 때는 연애시나 읽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살자고, 그냥 그렇게 지나쳐 보내자고 했지만 하나도 흘러가지 않았고 자꾸만 쌓였다. 

 

어느 순간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봇물 터지듯 한 적도 있었고 전화카드 한장 들고 경비병을 피해 전화부스 앞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어쩌지 못하는 감정,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다.

 

병장이 된 후로는 시시 때때로 전방에 상황이 발생했다.

 

김일성 사망 후 북 체제의 불안성이 증폭된 탓일까.

 

자고 일어나면 한 명씩 귀순하는 용사들이 생겼다. 

 

 

 

작전병들은 TOC에서 근무를 하는데 1일 24시간 일하고 익일 24시간 쉬는 형태를 취했다. 1일 2교대를 원칙으로 했지만 그러다가는 낮밤이 완전히 바뀌는 올빼미병사들이 생기는 터라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식으로 했다. 그런데 내가 근무 들어가는 날마다 귀순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면 이를 보고하기 위해 예정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근무지에 머물러야 했다. 물론 그 덕에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포상휴가증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 2박3일짜리 휴가증은 결국 그녀를 내 앞으로 오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96년 1월 군 제대를 명받았다. 2년 2개월.

 

나는 하나 달라진 것 없었지만 그녀는 많이 단단해 보였다.

 

제대 후 뭘 해야하나 수 많은 고민을 했다.

 

그녀와는 정 할 거 없으면 부모님께 아이스크림 편의점이라도 내달라고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때마침 IMF가 왔다.  

 

 

 

아버지가 투자했던 사업이 위험에 처했고 자금이 경색되면서 하던 일들이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일은 해야했기 때문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작업실을 꾸몄다.

 

낮 시간에는 교구제작업체에서 일했고

 

퇴근 후에는 작업실에서 만화를 그렸다.

 

몇몇 주간신문에 작품을 연재했다.

 

반응이 좋지 않았다. 

 

몇차례 실렸다가 끊기고, 실렸다 끊기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1년 여를 보내면서 만화에 대한 생각을 글로 옮기고 있었다.

 

중학교 때는 먹끈을 갈아서 쓰는 타자기를 빌려서 글을 찍었고

 

고등학교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전자식 워드프로세서를 사서 시를 썼다.

 

그리고 군 제대 후에는 당시 저가에 보급됐던 국민PC를 업그레이드해서 그래픽용으로 사용했고

 

중고 IBM노트북을 구매해서 글을 썼다.

 

어찌보면 만화를 그리려했던 시간보다 글을 쓰려고 했던 시간들이 더 길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과정은 결국 만화에 대한 글쓰기로 이어졌다.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 부문이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신춘문예에 대한 열병 역시 전부터 앓고 있었다.

 

나는 일하고 만화 그리는 틈틈이 만화평론을 쓰기 시작했다.

 

군에서 쓴 원고를 토대로 200자 원고지 100매 분량의 두툼한 원고를 준비했다.

 

그녀는 그 과정을 곁에서 도왔고

 

교열과 교정을 봐줬고 뜸들이고 있는 나를 대신해

 

원고 뭉치를 들고 직접 우체국에 달려가기도 했다.

 

96년 12월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며.  

 

97년 1월 새해 첫 신문에 내 이름이 걸렸다.

 

나의 1994년에 대한 응답이었다.

 

첫 휴가, 그녀의 변심과 김일성 사망.

 

매일 들어야 했던 김건모의 핑계와 잘못된 만남

 

그렇게 94년을 버티고 95년을 보냈다. 

 

그리고 96년이 되고 보니 그녀와 나는

 

93년 입대 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만나서 책 읽고 글쓰고 서로의 글을 읽던 시절로.

 

그렇게 또 얼마를 보내고 나니

 

신춘문예가 내게 온 것이다.

 

물론 그녀는 또 나를 버렸다.  

 

등단 후인 1998년 문학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 때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끊어서 호주로 떠났다.

 

우리말과 글을 공부해놓고 외국에 나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이제 대학생에 불과한 나를 두고 가는 것은.... 이해할만 하기도 했다.

 

우린 공항에서 이별했고

 

그녀는 나와의 과거를 지우려 했다.

 

 

 

나는 늘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떠나냐'고 했고

 

그녀는 왜 '자신의 일은 봐주지 않고 네 일만 지켜보게 만드냐'며

 

이기적인 나를 떠나겠다고 했다.

 

그녀의 앨범에서 발견한 찟어진 사진.... 

 

물론, 나는 또 다시 그 사진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어쩌면 그녀가 붙인 건지 모르지만...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내 곁에서 자고 일어난다.

 

참 오래다...

 

그녀는 호주에서 돌아와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연극연출을 공부했다.

 

뭐 그렇게 배울 것이 많은 삶인지.

 

나는 서울로 올라와 이런 저런 만화 일을 하다가

 

한 벤처기업에 창업 멤버로 참여하면서 나머지 공부를 했다.

 

언론학을 공부했고 예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이제 문화경영을 공부하고 있으니

 

그 또한

 

참 오래다.

 

응답하라 1994

 

1994년을 버틴 까닭에  

 

나는 그녀의 남편이 됐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일보다

 

나의 일을 먼저 지켜줬다.

 

그녀는 그런 사랑을 했다.

 

12월 14일은 그녀가 짐 싸들고

 

우리 집에 들어 온 첫 날이다.

 

이전까지의 삶은 자신의 집에 두고

 

내 집으로 들어 온 그 날이다.

 

매일 감사해하며 산다.

 

여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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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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