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삽화(이도영 글그림), 한국만화정전, 네이버캐스트, 2012.10.11

최초의 한국만화

삽화, 이도영



[그림 1] 최초의 한국만화로 평가받고 있는 <삽화>, 이도영, 대한민보, 1909.06.02

■ 작품에 대하여 : 근대 만화의 기틀을 제시한 ‘삽화’


<삽화(揷畵)>는 1909년 6월 2일 창간한 [대한민보] 1면에 게재된 이도영의 작품으로 1911년 8월 31일 폐간 때까지 연재됐다. 목판화 기법으로 제작 인쇄된 이 작품은 ‘최초의 한국만화’, ‘최초의 신문 시사만화’로 불린다. ①단순·과장·풍자라는 만화의 3요소를 담고 있고 ②대중 배포를 목적으로 인쇄된 정기간행물에 연재 형식으로 게재되었고 ③다양한 만화적 표현기법을 창안했다는 점에서 한국만화사의 출발점이자 한국 최초의 만화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만화가협회와 한국시사만화가협회는 이 작품의 게재 일을 기준으로 지난 2009년 6월 2일 ‘한국만화100주년전’을 비롯한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한 바 있다.

<삽화> 1회는 한 신사가 고개를 들고 네 마디 말을 내 뿜는 장면을 묘사한다. 실크해트와 카이저수염, 연미복과 지팡이로 상징되는 개화기 신사가 ‘대한민보’의 한 글자씩을 이용해서 4행시를 짓는다. ‘대국(大局)의 간형(肝衡)’, ‘한혼(韓魂)의 단취(團聚)’, ‘민성(民聲)의 기관(機關)’, ‘보도(報道)의 이채(異彩)’로 ①국가 정세를 바르게 이해하고 ②한민족의 혼을 통합하여 ③백성의 목소리를 모아 ④보도 내용을 다채롭게 한다는 뜻이다. 아직 ‘만화’가 ‘만화’라는 이름을 지니기 전 [대한민보]의 창간취지를 서화가(書畵家) 이도영이 글과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삽화>라는 제호는 22회까지 사용되다가 이후부터는 제호와 횟수 표시 없이 게재됐다.

[그림 2] 칸 나누기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나쁜 인연은 그 결과가 결코 좋지 않다’ 편. 이도영, 대한민보, 1909년 08월11일

일반적으로 삽화라는 명칭은 ‘신문기사나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을 뜻하는 용어로 [한성순보](1883.10.31.)에 최초의 신문 삽화인 ‘지구도해’가 게재됐고 [독립신문](1896.05.18.)에는 소화제 광고에 만화적으로 묘사 된 삽화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도영의 [대한민보] <삽화>를 삽화가 아닌 ‘최초의 만화’로 칭하는 이유는 ‘네 가닥 선’ 때문이다. 일반적 삽화에서 볼 수 없는 ‘네 가닥 선’과 ‘손 글씨’가 만화의 핵심 요소인 말풍선(말칸) 역할을 했다. 이 네 가닥 선은 이후 두 가닥으로 변하면서 현재적 의미의 말풍선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 독특한 것은 말풍선에 말을 가두는 형식이 아니라 입에서부터 그어진 한 가닥 선을 두 가닥으로 벌려서 말을 적었다는 점이다. ‘말가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같은 방식은 말이 공간을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이도영의 <삽화>는 초기 형태의 만화적 표현 기호와 다양한 묘사법을 만들어내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항거하고 친일관료들을 비판하는 한편, 교육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 작가에 대하여 : 한국 최초의 만화가 ‘이도영’


[그림 3] 최초의 만화가 이도영은 청년기에 시사만화 창작과 계몽교육 활동을 펼치며 한국만화사를 열었으나 대한민보 폐간 이후로는 서화가로서만 활동했다.

관재 이도영(1884~1933)은 서울 출신으로 18세 때에 당대의 화가 소림 조석진(1853~1920)과 심전 안중식(1861~1919)의 문하에서 전통화법을 읽힌 서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만화가’이다. 1905년 교재 편찬에 주목적을 둔 애국계몽단체 국민교육회에 가입하여 각종 교과서의 삽화를 그렸고 이듬해에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항일 활동을 했다. 대한자강회가 대한협회로 바뀌면서 1909년 일간신문인 [대한민보]를 발행하자 1면에 현대적 의미의 시사만평인 <삽화>를 연재했다. 이도영의 활동 배경에는 일본에서 선진언론을 경험했고 서화에 관심이 많았던 오세창(대한민보 사장)의 역할이 컷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도영은 [대한민보] 폐간 이후로는 은사들을 중심으로 개설된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학생들을 지도했고 1918년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맡는 등 미술계 활동에 주력하며 사상적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만화가로서 이도영은 한국만화의 표현기호와 묘사법 등을 창안한 선구자이다. 한국 신문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한국 신문 백인의 얼굴(동아일보, 1964.04.11)’에 선정되기도 했다. 미술계에서의 활동도 컸다. ‘화단(畵壇)의 거벽(巨擘) 이도영씨 장서(長逝)’라는 제목의 유고 기사(동아일보, 1933.09.23.)는 이도영에 대해 ‘30년 동안 미술진흥에 노력’해왔고 ‘현대의 화풍이 말 할 수 없이 변천한 이때에 씨는 독특히 고래의 전형을 그대로 전하여왔었고 특장은 화혜, 영모절지’ 등 이라고 평가했다.


■ 주목할 만한 캐릭터와 명대사 : 언어유희로 어용기자를 혼내고 나라를 되찾자 노래해


이도영의 <삽화>는 강도 높은 실명비판으로도 유명했으나 상징적 캐릭터를 내세워 간접적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림 4] 악마 같은 기자를 등장시켜 간접적으로 일제를 비판한 ‘공평한 언론을 헐뜯다가는 천벌을 받는다’ 편. 현재적 의미의 말풍선과 유사한 방식을 보여준다. 이도영, 대한민보, 1910년 2월 17일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기자(魔記者)는 ‘악마 같은 기자’의 약칭이다. 일본의 침탈에 앞잡이 노릇을 한 일진회가 발행했던 [국민신문]의 어용기자들을 통칭했다. <삽화>에는 일진회를 비판하는 내용마다 호되게 당하는 마기자가 등장한다. 당대 민중들의 일본을 향한 분노가 마기자를 향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오른쪽 면에 표기 된 ‘황성에서 선진되는 정필’이라 적힌 부분이다. 황성신문을 본받으라는 의미로 자사의 이익에 앞서 민족지 진영 간에 협동노선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산으로 가며 복국(復國), 져 산으로 가며 복국, 복국 복국 복복국”


[그림 5] 언어유희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창곡도(俳優唱曲圖)’편. 이도영, 대한민보, 1910년 4월 10일

이도영은 <삽화>를 통해 다양한 유형의 풍자적 묘사법을 제시했다. 그중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 언어유희였다. ‘배우창곡도’편에서는 민요 새타령을 인용한 언어유희를 선보인다. 새타령의 후렴구인 ‘뻐꾹’을 나라를 되찾자는 의미의 ‘복국(復國)’으로 바꾼 것이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당대에 이 같은 노래가 민중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불려 졌을 법하다.


참고자료

‘이도영’에 대하여, 네이버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1674&mobile&categoryId=1634

‘대한민보’에 대하여, 네이버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5519&mobile&categoryId=1642

‘대한민보 보기’,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http://search.i815.or.kr/OrgData/NewsList.jsp?tid=ns&c1=%EB%8C%80%ED%95%9C%EB%AF%BC%EB%B3%B4&c2=&c3=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상, 시공사, 1999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0239

박재동 외, 한국만화의 선구자들, 열화당, 1995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9812


박석환/ 만화평론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전략기획팀 부장

세종대학교 대학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있고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이 당선된 후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비평서 <만화시비탕탕탕>, <코믹스만화의 세계>가 있고 만화이론서 <디지털만화 비즈니스-잘가라 종이만화>, <만화리뷰쓰기> 등이 있다. 공저로는 <만화>, <한국의 만화가 1, 2> 등이 있다.



개화와 계몽을 부르짓고 배워야 한다고 했던 사람

일제에 맞서 만화로 싸웠던 사람

개화기 일본인의 모습을 중절모와 연미복을 입은 모습으로 상정하고

남의 흉내를 내지 말아야한다하고

명분없이 상투를 자르면 안된다고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생각했던 당대의 지식인상은 일본인이 가져온 신식 의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이 개화기 신사를 대한민보 창간호에 그림으로서 한국만화는 출발했다. 

한국 최초의 만화가 한복입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상징적 부담감도 있었다.

그리고 이도영은 이후 연재분에서는 이 같은 모습의 지식인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다.이 컷이 대표 컷이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도영이라는 사람은

개화는 필요하지만 반일을 외쳤고

계몽이 필요하지만 친일을 할 수 없었던 당대의 활동적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대한민보 폐간 이후로는 일제와 권력에 맞서던 펜을 내려놓고

최초의 만화가에서 다시 미술가로 돌아갔다.

반일운동가에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 중 하나였던 미술전시회를 돕는 인사가 됐다. 

만화가로 활동하는 동안 이도영은 매력적인 한국인이었다.

하지만 미술가로 돌아간 이도영은 다소 불완전한 한국인이었다.

이를 어느만큼 다뤄야 하는지도 고민스러웠다.

쓰고 지우기를 몇 날... 이만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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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eokhwan

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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