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한국 현대만화의 출발점 만화가 김성환, 한국인, 네이버캐스트, 2009.08.28


네 칸 만화를 멈췄을 뿐, 나의 창작은 진행중이다


"신문연재를 안하고 있으니까 되게 한가한 줄 알아요. 그러다 보니 자꾸 이거 저거 하자고 그래요. 그걸 다하면 너무 힘들어요. 하고 있는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안돼요. 다 계획대로 하는데 갑자기 뭘 하자고 하면 제가 순순히 응할 수가 없어요.” 김성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수 차례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던 김성환은 잠시도 한 눈 팔 수 없는 최근의 근황을 알렸다.


신문이 창문 없는 집 같았다. 그래서 만화라는 창문을 냈다


“2010년에 개인전을 해요. 신작 30점 가량을 내놓을 거예요. 고바우를 테마로 한 동양화 전시회(2000년)와 한국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풍속화 전시회(2004년)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요. 덕분에 그림 값도 많이 올랐어요(웃음). 그런데 새 전시회를 할 때마다 보통 신경 쓰이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번에는 캐릭터가 없는 파스텔화를 선보이려고요. 할 일이 많은데 그간 했던 것을 정리하는 일도 게을리 할 수가 없어요. 인천시가 ‘김성환 박물관’을 건립하자고 해서 소장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 일 역시 만만치가 않아요. 시에서 지정한 건축부지가 개발제한이 묶여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하는데 잘 되겠죠.” 60여 년 간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은 77살의 열정가는 여전한 기력으로 자신의 시선과 고민을 그려내고 있었다. 네 칸 만화원고지 대신 대형 캔버스로 장소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각종 생활사 자료에 대한 수집가로서의 열정은 오히려 젊은 시절을 능가했다.


김성환은 1932년 이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동순은 1920년경 김상옥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0여 년 동안 청진감옥에 수감됐던 독립투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주의 돈화라는 곳에 살면서 지역유지로서 귀농조합을 결성하고 오족협화회의 지부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아닌 친일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만다. ‘해방이 됐으니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거’라고 믿었던 김성환 일가는 개성을 거쳐 서울로 내려왔다. 하지만 조국에서의 생활은 더 혹독했다.


성환은 만주에서 돈화국민우급학교를 거쳐 길림6고(지금의 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로 전학한다. 당시부터 학교 미술부장을 지내는 등 그림에 소질을 보였던 김성환은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네 칸 만화를 그려서 <연합신문>에 보냈다. 김성환은 외국신문에 있는 만화란이 한국신문에는 없는 것을 보고 ‘아무리 보아도 창문이 없는 집 같아 보였다’고 회고했다. 신문사에서는 ‘학비를 대주겠다’며 만화를 계속 그려 달라했고, 김성환은 얼마 되지 않아서 <화랑>잡지와 선배 만화가 김용환이 편집을 맡았던 <만화뉴스>에서 매달 1만원씩을 받는 전속만화가가 됐다. 1949년, 열일곱 나이에 김성환은 만화계에 데뷔하며 만화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하지만 곧 한국전이 터졌고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한영주, [한국만화사구술채록연구-김성환]편, 부천만화정보센터 간, 참조).


민족의 비극이 있었고, 나의 만화가 있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눈에 뛰는 젊은이는 모두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갔어요. 김용환씨한테 월급 받으러 갔더니 ‘수금이 안되어 돈이 없다’며 쌀 배급해주는 데를 알려줘요. 가보니까 조선미술동맹이에요. 이승만이 도망가고 김일성이 탱크 몰고 달려가고 맨 이런 거 그리고 있어요.” 김성환은 9.28 서울수복이 될 때까지 공산군을 피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자 조각가 윤효중 등이 발행한 <만화신보>에 참여했고, <신태양>, <희망>, <학원> 등에 작품을 게재했다. 김성환은 전시에 김병기 화백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하면서 계몽포스터와 삐라, 주간만화잡지 <만화승리>, <육군화보>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미술대 내에는 화단의 중진들로 구성된 종군화가단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김성환은 이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




1951년 대구에서는 아동만화를 주로 작업했는데 소설가 방기환과 함께 했던 '도토리용사', 남향문화사에서 발행한 '사육신', '도마스목사얘기' 등이 호평을 받았다. 특히 붓으로만 작업한 '사육신'을 보고 당대의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이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52년에는 시인 김소운 등과 함께 성인만화잡지 형식을 취한 <만화만문전람회>, <만화천국>을 도맡아 발행했고 1953년에는 학생잡지 <학원>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청소년층은 물론이고 성인층에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고 1977년 석래명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고교얄개' 시리즈로 유명한 이승현과 김정훈이 주연을 맡았다. 김성환은 한국전 시에 미술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참혹상을 스케치에 담는 한편,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웃음을 전했다.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 한국에는 특종이 터진다


김성환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고바우’는 피난 중에 탄생한다. 김성환은 고바우 외에도 피난 중 다락방에 숨어 살면서 200여 명에 달하는 만화주인공을 습작노트에 기록했다고 한다. 고바우는 그 중 하나로 ‘높을 고자를 쓰는 성씨에 바우라는 이름을 붙여, 친근한 이웃 같지만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을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과장된 얼굴 표현을 담아내려 노력했던 당대의 만화 캐릭터와 달리, 표정을 없애고 한 가닥 있는 머리털로 심리상태를 표현했던 것도 이 같은 고민의 결과였다.




고바우 캐릭터는 다양한 매체와 작품을 통해 등장했는데, 1950년 12월 30일 발행된 ‘사병만화’가 첫 시작이다. 고바우가 폭 넓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 9만부를 발행했던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부터이다. 문화면을 담당했던 시인 이상노의 청탁으로 1955년 2월 1일부터 ‘고바우’가 연재됐다. 만화를 신문에 게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언론계에서는 고바우의 인기를 확인한 이후 잇달아 연재만화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김경언의 ‘두꺼비’를 시작으로 김기율의 ‘도토리’, 신동헌의 ‘주태백’이 등장했다. 거리에서는 어린이들이 ‘고바우 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만 낳더래’라는 작자미상의 노래를 불렀고 ‘고바우’를 간판으로 내 건 각종 상점이 전국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여류시인 이영도는 ‘석간을 펼쳐 들면/ 손주놈 고바우를 묻는다./ 혀끝에 진득이는 이 풍자 감칠 맛을/ 전할 길 없는 내 어휘/ 모국어도 가난하네’라며 고개를 숙였고, 시인 고은은 ‘저 유신 시절/ 며칠 동안 아무도 모르게/ 고바우는 끌려갔다./ 우리는 그가 어디 있는가 모른 채/ 그의 빈칸 신문을 넘겨야 했다’며 ‘네 칸 짜리 고바우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를 이루었다.’고 노래했다.


김성환과 고바우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했다. 유신독재와 군사정권 하에 잃어버렸던 풍자와 비판의 정신을 살아남게 했다. 그리고 고은 시인이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의 시대를 이루’기 위해 권력과 싸웠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의 웃음을 짓기도 했고, 그가 싸워주는 것에 대해 위안의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사이 김성환은 각종 필화 사건을 겪어야 했다. 검열에 의한 삭제와 정정은 수백 차례였고, 즉결재판과 벌금형에서부터 괴청년들의 미행, 정보부 요원들에 의한 취조, 이민이나 가라는 공갈 협박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1963년 AP통신이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과 함께 고바우 만화를 소개한 후로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1973년 산케이신문은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토픽으로 전하기도 했고, 이후 ‘고바우 영감은 살아있다’는 기사를 통해 김성환의 건재를 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성환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갔을 때는 세계의 외신기자들이 김성환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김성환은 그렇게 14,139건의 사건사고를 소재로 고바우라는 만화를 그렸다. ‘독재라거나 민주주의의 제한이라거나 하는 것이 싫을 뿐’이라는 이유로 누구보다 용감하게 오늘의 우리 사회를 만들어 냈다.


삶을 기록하고 수집한다. 그것으로 세상과 역사를 그린다


“신문 연재를 그만두고 2001년쯤 이곳(분당의 화실 겸 자택)에 왔어요. 지하는 꽤 큰 공간인데 거기서는 작은 그림을 그려요. 2층에 작은 작업실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서는 큰 그림을 그리죠. 세밀하게 그리려면 큰 데가 편하고, 크게 그리려면 작은 데가 편해요.” 김성환의 최근 작업실은 그렇게 나뉘어 있었다. 100여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지하실은 앉은뱅이 책상이 놓여있는 작업실이자 작은 갤러리였고, 개인박물관이자 수장고였다. 책상 위에는 현재 작업 중인 A4사이즈의 파스텔화가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누군가에게 팔린 그림이 포장되어 있었다. 벽면에는 개인소장용 작품 10여 점이 걸려 있었고 최장수 연재만화를 증명하는 인증서와 각종 기념사진도 있었다. 철제로 된 옷장 크기의 함에는 그간 그렸던 각종 만화의 원고가 보관되어 있었고 유리장에는 옛 것으로 보이는 각종 물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작업 중이던 그림과 벽에 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던 김성환은 유리장에서 화첩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김환기, 김용환, 이상범, 김승옥, 정현웅 등 5, 60년대 활동하던 작가들과 이현세, 허영만, 이두호 등 요즘 활동하는 작가들의 원화가 수 백장 들어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장편만화의 원화 한 페이지가 김성환의 품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사 수집가로서도 명망이 높은 그의 수집 품목들을 보노라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세계적인 우표수집가로 1986년 스웨덴 국제우표전에서 대금상을 받기도 했다. 우편봉투에 그림을 그려 유명 화가들과 서신을 주고 받은 것을 ‘까세’라고 하는데 김성환은 40여 년간 150여 명의 화가들과 까세를 주고 받았고 이를 [나의 육필 까세집]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 내기도 했다.



유리장에는 소문과 목록으로만 접했던 각종 고서적들이 세월의 풍파를 견딘 당당한 모습으로 책 등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한 켠으로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질의 만화책이 있었다. [슬램덩크]로 유명한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극화한 [배가본드]였다. “누가 추천해줘서 봤어요. 고증에 철저를 기한 모습이 좋았어요. 우린 이런 게 좀 부족해요. 이순신이고 거북선이고 그렇게 좋아하면서 조선 수군 옷은 왜 다 일본에 가 있어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그걸 또 제대로 후손들이 써야죠.” 2층 작업실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한국전 이후의 남루한 초가집을 묘사한 그림이다. 토방 마루 밑에 아무렇게나 벗고 들어간 고무신이 놓여 있고 창호지에 비친 여인네가 아이에게 젓을 먹이고 있다. 그런데 캔버스 옆쪽으로 놓인 작은 선반에는 진짜 고무신이 놓여 있었고 50년대의 서울 풍경과 도심의 초가집 사진이 놓여 있었다. 김성환은 그렇게 역사를 수집하고 후대가 보지 못한 당대의 사실과 한 때의 시간을 그림으로 살려내고 있었다.


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다


“만화를 오래 그렸다고 회화적 역량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고바우를 넣어서 그렸더니 만화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럼 캐릭터 없는 거 사 가라고 그래요(웃음).” 김성환은 시사만화나 아동만화에서뿐만 아니라 화가로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동양화와 서양화 개인전을 11회 열었고 지금 12회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풍자와 비판이라는 시사만화의 세계에서 살던 이에게 동심과 기지라는 아동만화의 세계를 바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다가도 이를 완벽하게 해낸 그의 창작 목록을 대할 때면 필부의 기우가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초충도와 동물화에서는 미물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고 풍속화에서는 풍자적이고 과장된 선묘를 사용하면서도 어떤 기록물보다 사실적으로 당대를 읽어낼 수 있게 하고 있다. 사실 그대로를 비판해왔던 시사만화가의 시선을 만나는 듯 했다. 반면, 풍요로운 삶의 한때를 묘사한 산수화와 서화에서는 먹의 고풍스런 멋과 함께 그림 곳곳에서 해학과 기지 그리고 동심으로 가득한 아동만화가 김성환이 느껴졌다. 재료와 기법에도 제한이 없고, 관습과 형식으로부터도 구애 받음이 없어 보였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화가 김성환의 세계였다.



“50년간 고바우를 그렸다고 하니까 아무개는 제가 무슨 성공가도를 달린 것처럼 말하기도 해요. 편하게 언론사 고위직에 앉아서 쓱쓱 만화만 그린 줄 아는 사람도 있어요.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건데요. 그런 걸 인정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런 데 인색해요.” 김성환은 2007년에 연 ‘고바우 서화 소품전’의 첫 머리에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다’는 의미를 지닌 서화 ‘마부작침(磨斧作針)’을 걸었다. 뭐든지 꾸준히 하라는 뜻이다. 이태백이 냇가에서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려고 하는 노파를 보고 비웃자 ‘중도에 그만 두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김성환은 그처럼 만화를 그렸고 우리사회에 고바우의 정신이 살아있게 했다. 우표를 모으고 각종 생활사 자료를 모아서 우리의 과거사가 기록으로서 살아있게 했다. 만화로 이룬 업적에 만족하지 않고 ‘만월은 지기 마련’이라며 화업을 멈추지 않아 또 다른 예술의 길을 열고 있다. 77살, 그만큼 열심히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글 박석환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콘텐츠비즈니스팀 수석, 만화규장각 필자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대중문화를 전공했다. 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으로 등단한 이후 <잘가라 종이만화>, <코믹스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 다양한 만화평론서를 발표했다. 블로그_ blog.naver.com/comicspam

사진 김덕화

발행일 2009.08.28

 * 게재 :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008&path=|462|571|&leafId=850


[인터뷰 후기]


몇 해 전 쓴 원고다.

몇 일 전 김성환 선생님 댁에 방문했다. 지난 8월 부천국제만화축제 때 선생님의 핸드프린팅 조형물을 설치하고 함께 축하했던 자리에서 뵙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나는 부천 사람 중에는 이용철팀장하고 박석환팀장 밖에 모르는데...'

'선생님 제가... 박석환입니다...'

'오... 이거 집사람이 외출해서... 음료수가 어...딨지' 하셨던...


선생님은 베란다 앞에 새모이를 가져다 놓고 새들을 불러모은 뒤 파스텔화를 그리셨다.    


'살아있는 걸 보고 그려야지. 죽은 거, 자료에 있는 거, 머리에 있는 거 그리려고 하면 힘들기도 하고 그러면 그게 어디 맞아요. 그럼 틀리잖아요. 얼마있다가 개인전을 또 하는데 이번 것은 십장생을 그린거라 상상해서 그렸지만 판자촌 연작이나 내가 그린 풍속화 이런 것들은 다 고증이 철저해요. 젊은 사람들은 못 경험한거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안 그리니까 그냥 나만 하는거죠.'라며 세월을 앞장섰던 고바우의 느린 걸음을 걸어보이셨다. 한줌도 포기하거나 내려 놓지 않은 이의 빛나는 결과와 거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김성환 선생님은 오는 11월 3일 만화의 날 때 만화인들을 놀라게할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고 계시다. N포탈과 함께.


두근두근 거린다. 빨리와라 만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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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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