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일본의 국민적 정신계를 재구축한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와 사상, 2012.4.22

데즈카 오사무 평론집 - 데즈카 오사무 SF만화의 사회적 의미


일본의 국민적 정신계를 재구축한

데즈카의 SF만화와 사상

박석환(만화평론가)


데즈카 오사무,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본 우주인


‘데즈카 오사무 선생은 우주인이다. 어딘가 우주 저편에서 지구로 와서 사명을 다하고 돌아간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담당 편집자였던 미츠야 다카노리는 1989년 2월 9일 세상을 떠난 데즈카의 장례식장에서 누군가가 한 이 말을 경박스럽게 느꼈다. 하지만 돌아서서 데즈카의 삶을 생각해보니 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일본의 아동문학연구자이자 문화평론가인 사이토 지로도 <아톰의 철학>이라는 평론서에서 ‘데즈카=우주인’이라는 평가에 진지한 분석을 더했다. 데즈카 오사무의 SF만화를 ‘우주로부터의 시선’이라는 주제로 분석하면서 작가의 상상력과 철학 속에는 지구인이 아닌 우주인의 ‘그 것’이 존재한다고 서술한다.  


‘유리와 같이 깨지기 쉽고 아름다운 지구가 우주 속에 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폭발과 화염, 초록색이 사라져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구를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내려다보았을 때의 그 충격. […] 모든 사람이 지구를 우주에서 볼 수 있다면, 그 소중한 공기와 초록 그리고 파란 바다를 더럽힐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 정거장과 달에서 태어나 교육 받을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데즈카 오사무는 가까운 미래에 지구 밖에 우주 정거장이 생길 것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가 탄생하면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지구를 내려다본 문자 그대로의 우주인이 되는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구를 있는 그대로 대상화해서 보게 될 것이란다. 다시 말해 지구 안에서의 삶과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구’를 본다면 옳고 그름이 분명해 질 것이고 그에 따라 갈등 없는 세상이 만들어 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소 황당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떨까.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적 정보통신단말기인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시작화면에 떠 있는 지구, 구글 어스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 뜨는 지구를 생각해보자. 초록별 지구의 동그란 외형에서 출발해서 현재 위치까지 점점 확대해가며 눈앞에 지금 있는 곳을 보여주는 이 신기한 도구는 데즈카의 우주적인 시선을 현실화 시켜 논 것 아닐까. 또는 데즈카가 상상한 미래 세계의 모습을 구현해 논 것은 아닐까.  



이 작은 도구로 우리들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GPS를 통해 연결된 위치정보로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은 도구 속에 있는 SNS 프로그램이나 각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전통적인 삶과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구’를 만난다. 사회적 위치나 지리적 위치에 구애 됨 없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수도 없는 갈등이 촉발되지만 수많은 이들의 지저귐으로 촉발된 갈등이 무마되고 승복과 화해의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물론 또 다른 갈등으로 인해 무시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적 합의구조가 작동하게 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의 세계를 떠돌며 현실을 회피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으나 이 도구가 곧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 지금 지구인들은 이처럼 우주에서 시작해 지구로 와서 일상의 공간을 인식하고 다시 비일상의 세계를 유영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팔고 있는 삼성전자의 브랜드가 갤럭시라는 것도 재미있는 단서가 될 것 같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창시자인 스티브 잡스는 지구인의 기능을 확장한 우주인의 삶을 지금 지구인의 일상적 삶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를 두고도 단순한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최고의 디자이너이자 혁신적 사상가 그리고 어느 날 지구로 온 우주인이라 불렀다. 스티브 잡스를 우주인으로 만든 것이 아이폰이고 아이폰을 통해 요즘 사람들이 스티브의 우주적 상상력과 교감하고 있다면 오래지 않은 과거의 우리들은 데즈카의 만화를 통해서 우주를 인식하지 않았을까.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으로 지구인의 기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면 데즈카는 상상력으로 가득했던 SF만화들을 통해 지구인의 사고를 확장했다.


전쟁을 경험한 반전주의자, 의사를 포기한 인본주의자

데즈카 오사무는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46년 <마아짱의 일기장>으로 데뷔, 47년 사카이 시치마의 원작을 만화화한 <신보물섬>이 40만부가 판매되며 인기 만화가가 됐다. 살아있는 동안 ‘일본 만화의 신’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1998년 세상을 떠난 후로는 ‘쇼와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세계문학과 허리우드 영화,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수많은 영감을 얻었던 소년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를 경험했다. 이념 간의 갈등이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체험했던 소년은 청년이 되면서 의사를 꿈꿨고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계획했다. 그러나 소년기의 꿈을 버리지 못한 소년은 의사박사 출신의 만화가가 됐고 만화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데즈카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동경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공습에 의해 자신의 현실문화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청년은 동경하던 대상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보편적 정서를 획득하고 일본을 넘어 동아시아 만화의 기초와 전통을 마련했다. 전쟁을 경험했기에 전쟁을 원하지 않는 평화주의자였고, 사람의 상처를 이성적인 의료행위와 감성적인 창작 활동을 통해 치유하고자 했던 인본주의자였다. 만화에 영화 연출 기법을 도입하여 표현 형식의 혁신을 주도했고 장편서사만화의 구조를 마련했으며 현대만화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남긴 혁신가였다. 또 자신의 팬터치맨이었던 이시노모리 쇼타로나 한참 후배가 되는 오토모 가츠히로에게도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을 만큼 열정적인 도전자였다. 일본의 만화사를 기록한 여러 연구자들은 데즈카 이전과 이후로 만화사를 구분하기도 하고 데즈카 이후를 현대만화의 출발점으로 평하기도 한다. 그만큼 데즈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초기 SF만화 3부작을 통해 보는 데즈카의 ‘우주적 시선’



2008년 한국의 AK커뮤니케이션즈 출판사에서 데즈카 오사무의 초기걸작선 세트가 발매됐다. 한국 내에서 <철완아톰> 등 데즈카의 수많은 작품이 발행된 바 있지만 초기 작품은 최초 발매되는 것이었다. 첫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보물섬>과 초기 SF 3부작으로 불리는 <로스트월드>(1948년 작), <메트로폴리스>(1949년 작), <넥스트월드>(1951년 작)가 전4권 한 세트로 묶여 나왔다. ‘대부의 아들(1973년 작)’, ‘종이요새(1974년 작)’ 등 자전적인 단편을 부록형식으로 구성하여 데즈카 만화의 변화와 발전을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철완아톰>(1952년 작)에서 아톰의 탄생일로 명기된 2003년 이후 데즈카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존경을 확인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최소한 한국 내에서는.

생전에 만화의 신이라 불렸고 활동 기간 내내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천재작가의 출발점을 확인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이 흥미가 요즘 독자들의 대중적 기호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초기 SF만화 3부작을 통해서 <철완아톰>이라는 세계적 명성을 지닌 캐릭터가 나오고 데즈카 필생의 역작이랄 수 있는 <불새>가 품어졌다면 어떨까.


- 지난 세기, 잃어버린 세계를 통해 얻는 재생의 희망

천재에게도 출발이 있다. 천재의 출발과 등장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낯설고 혁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어떤 완결성을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만화의 경우는 특정 분야의 천재성이 곧 여러 요소들의 완결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즉 그림에서 천재성을 보였다고 해서 글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고 글에서 천재성을 보였다하여 그림까지 좋기는 어려운 일이다. 간혹 두 요소를 충족시키는 천재가 등장했다 하더라도 이를 융합하고 전달하는 것까지 능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로스트월드>는 데즈카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린 ‘유령남’이라는 300페이지 분량의 SF모험 이야기를 원안으로 한 작품이다. 천재 소년 과학자 시키시마 켄이치 박사는 강렬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 신비의 운석으로 우주선을 개발하여 마만고별 탐험에 나선다. 마만고별은 지구와 닮은 별이지만 공룡이 살고 있는 중생대의 별이었다. 제목 그대로 지난 세기(Lost World)의 지구에 도착한 시키시마가 지난 세기의 지구에서 식물로 만들어진 여자와 일가를 이룬다는 이야기이다.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비밀결사대가 등장하고 탐정과 신문기자, 악당과 스파이 그리고 또 다른 박사가 등장하면서 탐정물에서 스파이물로, 모험물에서 공상과학물로 순식간에 변화해 간다. 다소 황당한 전개와 어설픈 데생력, 각종 이미지와 장르가 혼란스럽게 교차된다.  


스무 살에 4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천재작가이자 인기 작가였으나 데즈카의 그림 실력은 여러 출판사를 전전해야 할 만큼 인정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만화원고를 아연판에 대고 베껴서 인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데즈카 특유의 매끄러운 펜선도 찾을 수 없다. 설정과 내용 측면에서도 코난 도일의 SF소설 ‘로스트월드’와의 유사성을 무시할 수 없다. 데즈카는 ‘제목이 멋있어 보여서 그대로 사용’했을 뿐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밝힌바 있지만 현재의 인류가 공룡시대를 탐험한다는 설정의 독특함은 빛을 잃었다. 반면, 비극적인 결말과 켄이치가 식물로 만들어진 여인 아야매와 결혼해서 마만고별의 아담과 이브가 된다는 설정은 당대로서는 생소한 감동이었을 것이다.

중생대의 별을 현대의 인류가 확인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류의 출발을 목격했다는 것은 지구 역시 또 다른 마만고별이었을 수 있고 지구 최초의 인류가 곧 또 다른 겐이치와 식물여인 아야매였을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지구 밖에는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지구가 있고 이는 현재의 고통과 좌절이 없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지구’라고 설정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의 패배로 원자폭탄의 폭격을 경험한 일본인들에게 이는 잃어버린 일본, ‘새롭게 재생하는 일본’을 상징하는 의미로 읽히지 않았을까.


- 거대도시화, 급속한 발전에 대한 경고와 화해

데즈카는 독일 영화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여성 로봇에 대한 스틸 컷을 전쟁 중에 보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동명의 만화를 창작했다. 스스로 미국 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 작품이라고 밝힌바 있다. 작품의 배경은 맨하튼이나 시카고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고 다수의 컷에서 미국의 신문만화에서 볼 수 있는 표현 수법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미키마우스 월트디즈니라는 이름의 대형 쥐가 등장 한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19XX년. 로톤 박사는 태양에 거대한 흑점이 생기면서 발생한 방사선을 이용하여 인조단백질을 만든다. 비밀조직 레드당은 박사를 협박하여 인조단백질을 재료로 인조인간 티마를 제작하게 한다. 티마는 어마어마한 초능력을 발휘하는 로봇으로 날거나 헤엄칠 수 있으며 남자나 여자로 변신할 수 있다.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티마는 인간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로봇들을 선동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이에 티마의 친구였던 소년 켄이치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티마와 대립한다.   


전 작품에 비해 훨씬 안정된 작화와 연출력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데즈카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로봇 티마는 여성형이지만 입안의 버튼을 누르면 남성형으로 변하고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인간과 함께 사는 동거형 로봇이다. <리본의 기사>에 등장하는 사파이어 공주의 양성성과 <철완아톰>의 테마가 되는 인간과 함께 살면서 인간에게 버림받은 로봇의 원형이 곧 티마이다. 주인공 티마의 강력한 캐릭터성과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리고 티마의 최후가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일본만화사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한편인 이 작품은 2001년 당대 일본 최고의 스탭진이 참여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무시프로덕션 출신인 ‘은하철도999’의 애니메이션 감독 린타로, 만화가 오토모 가츠히로가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하여 티마를 부활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UN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근미래의 도시. 황당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과학문명이 인류를 위기에 빠지게 한다. 데즈카는 위기를 조장한 티마를 녹여서 없애버리지만 ‘부모도 없는 티마’를 용서한다. 인류와 로봇, 사람들과 과학기술 또는 신문명과의 화해를 제시한다. 작품이 발표됐던 1949년 일본은 패전 후 연합군의 점령-사실상 미군 통치 하에 빠른 속도로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했고 민주화와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졌다. 원자력을 이용해 제작된 아톰이 원자폭탄의 다른 모습으로 해석되고 전쟁 무기가 곧 평화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된 것처럼 <메트로폴리스>의 티마도 그처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힘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원자폭탄) 후 공포의 재생산을 막기 위한 방식으로서 데즈카는 화해(연합군/ 미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발달한 과학(연합군/ 미군)’을 잘 이용하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 망하게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놓치지 않았다.


- 다가올 세상, 대립과 전쟁을 방주와 평화로

<넥스트월드>는 가상국가인 스타국과 우란연방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속에서 핵무기 개발과 원폭실험이 계속된다. 이로 인해 스타국의 핵무기 실험지에는 돌연변이 신인류 ‘후우문’이 출현한다. 후우문은 곤충만한 크기이지만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쟁의 위기보다 돌연변이 신인류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더 큰 위기가 된 상황.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질식시킬 수 있는 거대한 가스 성운이 지구로 다가온다. 이를 안 후우문은 노아의 방주 같은 우주선을 만들어 인간 5백명을 비롯하여 동식물을 다른 행성으로 도피시키는 계획을 추진한다. 3중의 위기가 펼쳐지는 중에도 인간들은 극하게 대립하며 지구 최후의 날을 맞이한다. 앞선 작품들처럼 켄이치 소년과 콧수염 영감이 등장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가스가 지구를 덮치는 그 순간에서야 ‘평화’를 외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강화되면서 핵무기 개발로 인해 전쟁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1936년 H.G. 웰즈의 소설을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 감독이 영화로 만든 ‘다가올 세상(Thing to Come)’의 세계관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이 작품은 36년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상상력으로 가득한 SF영화의 고전 걸작이다. 데즈카는 ‘웰즈를 흉내낸 도작은 아니다’라고 밝힌바 있지만 앞선 작품의 의미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핵무기로 인한 갈등이나 돌연변이 생명체의 등장, 외계로부터의 가스침공,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우주선 ‘노아의 방주’ 등은 당대의 일본이 지니고 있던 현실적 고민과 맞물리며 독특한 설정의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핵실험으로 발생한 신인류와 노아의 방주는 전쟁위협에 대한 데즈카식 경고이자 일본인에게 보내는 충고로 읽히기도 한다. 강대국들의 군사적 대립과 핵무기 개발로 인해 돌연변이가 생기면-또는 원폭 공격에 의해 이미 생기고 있다면 그 돌연변이에 의해 강대국 또는 현생 인류는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신인류, 돌연변이는 작지만 초월적 능력을 보유한 일본인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는 아무런 준비없이 원폭피해를 당했던 일본인들에게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 아닐까.

전후 일본과 데즈카 그리고 초기 SF 3부작을 통해 제시된 미래

데즈카는 자서전 <만화가의 길> 서문에서 ‘앞은 캄캄하고 불합리하며 불안정한 현대 생활! 울적함을 가장 민첩하고 손쉽게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주위에 호소하는 수단, 그것이 결국 만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제2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 그리고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후세대들은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데즈카도 전쟁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군수공장에서 일하면서 전쟁의 참혹상과 폭격기의 공습을 직접 경험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 전반에는 전쟁과 공습에 대한 공포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빠른 속도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국가가 됐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 타이완, 미나미카라후토(사할린 섬 남부 지역)를 합병하고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한 강국이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주변국의 저항과 미국 등 기존 열강과의 충돌로 인해 연합군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역사상 첫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라가 됐다.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제국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내 전쟁을 종결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이미 패색이 짙었던 일본에 원자폭탄까지 투하할 필요가 있었나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대다수의 원폭피해자가 민간인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인 그리고 데즈카는 이를 ‘불합리’한 것으로, 또한 전쟁이 끝났으나 여전히 ‘불안정’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전쟁이 더 큰 전쟁을 부르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이 받아야 한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데즈카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 인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 조선과 주변국들은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와 야욕으로 인해 크나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에는 그 같은 상처가 전후(戰後) 일본인의 것이 됐을 터. 전쟁이전 대동아공영을 꿈꾸던 전전세대와 전쟁확전의 오명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전후세대의 인식 사이에는 크나 큰 벽이 생겼을 것이다. 일등국민이라는 의식은 사라지고 난폭한 전범자이거나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린 패배자라는 의식 속에서 생존의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 처지였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운명, 꿈이 사라지고 참혹한 현실만 남게 된 전후세대의 고통과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하는 것이 데즈카의 일이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데즈카의 초기 SF 3부작에는 이 같은 현실적 고민과 문제가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당대 만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극적 결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작품 전반의 디스토피아적 전개와 달리 몇몇 설정에서 드러나는 현실인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 역시 당대 일본과 일본인 그리고 데즈카의 고민과 연결된다. <로스트월드>에서 그려낸 또 하나의 지구와 새로 써가야 하는 마만고별의 역사는 종전이후 1947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새롭게 건립된 국가 그래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국가를 상징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UN경찰은 연합군이 통치하고 있는 일본과 다르지 않고, <넥스트월드>의 강대국간 핵전쟁 위협 속에 등장한 신인류는 새로운 일본인이다. 전쟁으로 생긴 멍에를 진 일본인들에게 지금 이곳이 아니라 저 곳 우주를 바라보게 하고, 오늘의 비극적 현실이 아니라 위협은 지속되지만 의지에 따라 새롭게 꾸며갈 수 있는 미래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 같은 메시지는 그대로 일본인들의 정신계를 형성하는 요소가 됐다. 이 때문에 데즈카는 만화의 신이 아니라 쇼와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초기 SF 3부작에서 드러난 미국문화에 대한 데즈카의 애정이다. 몇몇 자전적 작품을 통해서 보여줬던 미군에 대한 분노와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일정부분 일본인과 데즈카의 국민적 정서를 보여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데즈카는 출세작 <신보물섬>에서 미국대중문화의 상징이랄 수 있는 타잔을 등장시킨데 이어 초기 SF 3부작에서도 뽀빠이, 미키마우스 등을 등장시킨다. 미국과 미국문화를 분리해서 수용하는 태도로도 읽히고 미국과 일본이 현실 세계에서도 융화되어야 한다는 사상적 태도로도 읽힌다. 이는 미국에 대한 일본의 현실적인 피해의식을 초월한 태도이다.

이처럼 데즈카의 초기 SF 3부작은 전쟁을 경험한 데즈카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외쳐야 했던 배경과 일본의 재건을 위해 일본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상황 그리고 대표작인 <무쇠팔 아톰>과 <불새>에서 보여준 반전사상과 인본사상의 뿌리를 담고 있다. 특히 아톰이 상징하는 ‘핵은 전쟁이 아니라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는 데즈카의 사상적 기초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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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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