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한, 네이버 한국인 - 바른만화의 제안자 만화가 이희재, 2009.7.12

이희재는 우리 만화의 사회비판성과 현실참여주의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만화가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뿐만 아니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서도 작가는 사람 사는 세상의 아프기만 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며 우리 만화의 색다른 가치를 제시했다.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 바른 만화를 그리다

이희재는 명랑만화가 이정문과 시대극화의 대가 김종래의 문하를 거쳐 만화계에 입문했다. 그가 만화계에 발을 들여 놨던 시기에는 작품의 내용 측면에서 군사정권의 검열을 받았고 유통 쪽에서는 특정 기업의 독점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만화나 만화가를 대하는 대중의 인식도 ‘불량’ 했다. 모든 것이 만화가를 억압하는 구조였다. 그 역시 당대 만화계의 병폐로 꼽히는 대본소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 생활의 곤궁 사이에서 지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선택했다. 만화가 환상의 세계만 쫓고 있을 때, 만화가 도처에서 유린당하고 있을 때 이희재는 ‘바른만화’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한 만화를 발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만화가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소중한 꿈을 향해 정진한 결과다.

섬마을 소년의 현실, 가슴 속에 품었던 꿈

이희재는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한참을 더 가야 하는 신지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어촌에서 이희재가 할 수 있던 것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지게를 지고 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섬마을까지 들어 온 만화책을 친구에게 빌려 읽는 일이었다. "섬마을에 들어온 만화책은 다 낱권이었어요. 앞뒤 편이 없으니 뒷이야기가 얼마나 궁금했겠어요. 미칠 것 같았죠. 몇 번을 다시 봐도 앞뒤를 모르겠더라고요. 그 때 본 작품이 김산호 선생님의 [라이파이]예요. 그런데 어느 날 먼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라이파이가 '짠'하고 나타나서 뒷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웃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부모님과 함께 섬마을에서 살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뭍으로 나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모님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읍내에서 열리는 축구대회에 우리 동네 초등학교가 출전을 하게 됐어요. 사람이 모자라서 따라갔다가 시합에도 나가고 엉겁결에 중학교 진학시험도 보게 됐죠. 큰 기대를 안했는데 시험에 붙어서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됐어요. 섬마을을 벗어나 처음 뭍에서 살게 된 거죠." 광주에 사는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 집과 학교 외에 다른 곳은 갈 생각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형이 만화방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낱권으로만 만났던 영웅, [라이파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나게 된다. "거기가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꿈 같았죠."

이희재는 만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이상석 선생님의 [철인삼국지]라는 만화를 따라 그려서 출판사에 보냈어요. 처음 보낸 것이 2등으로 뽑혀서 책에 나왔죠. 뭐라 형언할 수 없이 기뻤어요. 친구들한테 은근슬쩍 자랑도 했죠." 이희재는 여느 만화가들의 학창시절처럼 독자만화란에 열심히 투고했다. 이런 이희재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이가 있었다. 명랑만화 [심술천지] 시리즈로 유명한 이정문이었다. "이정문 선생님이 제가 그린 독자만화를 보고 우리 집에 편지를 보냈어요. '재주가 있으니까 서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고 아버지가 선생님한테 '잘 부탁한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어요. 붕 떴죠. 진짜 만화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중학교 졸업식도 참가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갔죠. 그런데 이정문 선생님이 새로 하기로 한 일이 틀어졌는지 절 책임질 수 없게 됐어요."

현실은 만화처럼 멋지게 전개되지 않았다. 이희재는 1주일 만에 왔던 길을 되물어 집으로 향해야 했다. 실패한 귀향인 셈이다. 이후 온 가족이 서울로 상경했고 이희재는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낮에는 만화 선생님을 찾아 다녔다. 신문 단칸 광고를 보고 찾아간 화실에서 이희재는 당대 최고의 시대역사만화가 김종래를 만나게 된다. 섬마을의 고단한 삶을 위안해줬던 만화, 바깥 세상에 대해 모르는 촌놈에게 환상적인 세상을 보여줬던 만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탓이다. 현실은 늘 생각과 달랐지만 이희재는 가슴 속에 품었던 꿈을 향해 걷고 있었다.

시장독점과 작품심의, 나는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않았다

이희재는 [눈물의 수평선], [엄마 찾아 삼만리], [암행어사] 등 6, 7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을 탄생시킨 김종래 화실에서 박상호, 한재규, 김종옥(김종래 동생) 등과 함께 먹을 갈고 배경을 그렸다. 이정문은 이희재를 문하에 들이지 않았지만 만남을 유지하며 틈틈이 일거리를 주선해 줬고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그 인연으로 당시 유행하던 '명랑' '야담과 실화' 등의 잡지에 2페이지짜리 명랑만화를 게재하기도 한다. 부당한 것을 참지 못했던 심술통식 폭소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내용으로 감동을 전했던 두 선생의 작업은 그대로 만화가 이희재를 만들었다. "이정문 선생님이나 김종래 선생님은 언제나 공부를 강조했어요. 배우지 않으면 반쪽짜리 만화가가 된다고 했죠. 그림재주가 있어봐야 이야기를 부리지 못하면 쓸모 없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형편이 안 좋아서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해서 검정고시학원을 다니기도 했는데 이런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헌책방을 돌면서 작문기초부터 읽기 시작했죠. 문학, 사회학, 철학 관련 책들을 쉬지 않고 읽었어요. 그 속에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죠."

스무살 청년 이희재는 그렇게 만화를 시작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섬마을을 나서고 서울에 올라왔던 것처럼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고, 생각했던 만화작업 역시 원하는 것처럼 되지 않았다. "성인이 됐으니 돈을 벌어야 하는데 방 안에 틀어 박혀서 끄적거리고만 있으니까 눈치도 보이고 싫더라고요. 그래서 남서울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의 데생 일을 했어요. 2년 하면 독립시켜주겠다고 해서 열심히 했는데 이후로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출판사에 찾아갔죠." 당시는 만화책을 만화방에 공급하는 총판이 독점적 위치에 있었다. 모든 출판사가 총판에 소속됐고 이 총판이 만화책 생산과 유통을 총괄하고 있었다. 독점 체제 하에서 작가들은 총판이 요구하는 대로 작품 활동을 했다. 심지어 필명까지 지어줬다. "그 회사 사장이 작가들 필명을 다 지어줬어요. 부동산 투기에 해박했던 양반인데 땅값이 오를 것 같은 동네나 지역 이름을 작가들의 필명으로 사용하게 했죠. 오르는 이름이라는 거예요. 남서울도 그 분 솜씨고 저한테는 남제주라는 필명을 줬어요(웃음)."

특정 기업이 만화유통 시장을 독점하게 되면서 웃지 못 할 일도 많이 생겼고 만화가에 대한 횡포도 심해졌다. 이희재는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모래알'이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 만화를 2년쯤 그렸다. "그 때는 만화가 이상무 하면 독고탁 하는 식으로 작가마다 캐릭터가 있고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작품을 했어요. 저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 독자들 반응도 안 좋았죠. 어느 날 출판사 사장 아들이 이소룡을 주인공으로 해보라는 거예요. 못하겠다고 했더니 짤렸어요." 이후 이희재는 팬시 회사, 애니메이션 회사, 학습지 회사 등을 전전했다.

그렇게 70년대가 가고 80년이 됐다. 만화총판과 출판사의 독점체제가 깨지면서 새로운 출판사가 등장했고 높은 원고료를 주면서 작품을 모집하고 있었다. 만화에 뜻을 품었던 스무살 이희재는 서른이 되어서야 하고 싶었던 만화를 하게 된다. "81년에 [명인]과 [억새]라는 작품을 냈어요. 실질적인 데뷔작이죠. 지금 생각하면 만화예술이라는 것에 너무 매몰되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외줄타기 서커스를 하는 가족과 공장에 다니면서 고학하는 남매 이야기였죠." 두 편의 작품은 기존의 만화가 추구하는 세계와 만화를 통해 독자가 얻고자 하는 가치와는 많이 달랐다. 웃음과 환상보다는 뼈아픈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 이희재식 만화는 새로웠으나 독자의 관심보다는 검열기관의 관심을 끌었다. 만화책을 사전 심의했던 검열기관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그렸다'는 이유로 이희재의 원고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의 만화는 통제되었을지언정 길들여지지는 않았다. 시장을 독점했던 사업자의 요구와 회유도, 날 선 검열기관의 지적과 칼질도 이희재를 시스템 안에 가두지 못했다.

악동이와 간판스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만화에 담다

"손이 느려서 많은 량을 작업하지 못해요. 혼자 하기 때문에 몇 권씩 한꺼번에 작업해야 하는 대본소용 만화는 저한테 맞지 않았어요. 잡지는 정기적으로 적은 량을 그리면 되고, 단행본보다 상대적으로 심의에서 자유로운 만화잡지가 편했죠." 어린이용 만화전문잡지 '보물섬'이 창간됐고 이희재는 83년부터 [골목대장 악동이]를 연재한다. 당시 '보물섬'은 창작만화와 명작만화(아동교양물 형식을 취한 소설이나 동화를 각색한 만화)를 절반씩 게재했고, 심의기관에서 이를 통제하고 있었다.

"편집부에서 명작만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빅토리아 빅터의 '악동일기'를 한국식으로 각색해 보겠다고 했죠. 그러고 나서 내용을 맘대로 바꿔서 그렸어요. 연재하면서 반응이 좋으니까 편집부에서도 별 말이 없었어요." 최고 권력자였던 골목대장 '왕남이'를 이사 온 '악동이'가 박치기로 제압하고 혁명에 성공한다는 기둥 줄거리를 가진 이 작품은 당시의 군부독재 아래서 권력에 아부하며 기생하는 현실 정치판과 이에 눌려 살아야 했던 민중의 삶을 성공적으로 패러디 했다.

이희재는 '악동이'를 연재하는 한편 성인을 위한 여러 편의 단편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잡지가 등록제여서 누구나 만들 수 없었어요. 그런데 86년쯤 되면 아시안게임도 열리고 해서 매체 환경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등록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 다양한 성향의 만화전문잡지가 생길 거라 믿었죠. 그때가 되면 제가 원하는 형태의 만화가 읽힐 거라 생각했어요." [새벽길], [간판스타] 등 이희재 만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단편은 이 시기에 작업 된 것이다. 이희재는 86년 성인만화잡지 '만화광장'이 창간되자 모아뒀던 단편을 한편씩 공개했다. 실업자, 실직자, 샐러리맨, 여공, 술집종업원, 청소부 등 급격히 산업화 된 도시에서 도시 빈민 또는 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을 가감 없이 그렸다.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고,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이 이희재의 준엄한 시선을 통해 낱낱이 공개됐다.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그 자체로 깊은 충격과 감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희재 식 만화는 사실주의만화 또는 현실참여만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작의 재해석, 이희재식 바른만화

이희재는 바스콘셀로스의 성장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윤복의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 위기철의 소설 [아홉살 인생] 등을 원작으로 한 이희재식 만화를 다수 발표했다. 연재 당시부터 길게는 20여 년이 흐른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는 스테디셀러이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따듯하면서도 강한 모습은 원작의 감동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제가 한 작품들을 보면 대중적으로 크게 사랑 받았던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이 있어요. 오리지널리티가 좀 부족한가 싶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작품들이 제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열심히 하다 보니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원작을 각색하는 일이라는 것이 저도 좋아하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작품의 설정을 빌려오는 일이잖아요. 그것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그렇게 될 수만은 없는 것 같아요."

이희재는 88년 바른만화연구회를 결성 이른바 만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간행물에 대한 심의 기준이 완화되면서 좋은 만화창작 환경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작가는 일본만화 해적판이 폭력만화와 음란만화 시비를 불러 오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했다. "너무나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만화에 대한 기준과 출판업자나 돈만 보고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행태가 너무나 달랐죠. 그래서 바르게, 상식적으로 만화를 그리자고 했던 거예요. 당시 만화계에 넘쳐나던 만화공장, 일본만화표절, 문하생 착취 구조 등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희재는 ‘독소와 공해가 없는 만화, 윤리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만화, 자유분방하면서도 만화가 갖고 있는 고유영역을 활용하는 만화가 좋은 만화’라며 바른만화론을 펼쳤다.

이후 만화관련 소그룹들을 모아서 우리만화발전을 위한 연대모임(현 우리만화연대)을 결성하는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만화창작을 통한 현실비판과 사회참여, 만화창작교육 등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작품 외적인 활동에서도 이희재는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수년간 열의를 다해 10권 전집으로 그려낸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는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작품 자체는 두 작가의 공력과 역할에 빛을 더 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판매성과 역시 슈퍼 베스트셀러급이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보수 문학인으로 통하는 이문열의 작품을 ‘진보 만화가 이희재’가 만화화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따랐다. "사람들이 왜 이 작품을 하냐고 수군거리기도 하고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어요. 저 역시 출판사가 처음 요청했을 때 그런 시각에 대해 고민 했었죠. 사실 정본 [삼국지]와 [이문열 삼국지]의 차이는 ‘이문열의 시각으로 서술한 부분이 얼마만큼 포함 되었나’였어요. 만화 작업을 할 때는 분량 문제도 있거니와 인물과 사건, 전체적 이야기의 흐름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이문열의 시각은 많이 빠질 수밖에 없었죠. 제 그림으로 [삼국지]라는 고전을 아이들이 봐도 재미있도록 구성하자는 생각만 했죠."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이 꿈 꿀 수 있는 만화가 나와야

지난해 부천만화대상의 대상작으로 선정됐던 [아이코 악동이] 이야기를 꺼내자 이희재는 '부담스러운 상'이었다는 이야기부터 했다. "개인적으로 수줍음도 많이 타고 그래서 상 받는 걸 안 좋아해요.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많고요.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서로 좋아해야 하는데 전 부담되더라고요. 옛날에는 안 받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준다는 사람들이 불편해지잖아요. 그래서 받았죠(웃음)." [아이코 악동이]는 2005년부터 '개똥이네 놀이터'라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됐던 작품이다. [골목대장 악동이]를 기초로 새롭게 창작한 작품으로 2008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과거의 악동이가 골목에서 현실사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면 새로 나온 악동이는 아이코라는 캐릭터와 함께 역사와 신화, 옛 이야기의 현장을 모험하며 우정, 인권 등 다양한 주제를 전한다. "옛날에는 그런 생각을 안했는데 [도라에몽]을 보면서 우리한테도 저런 만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라에몽은 과학이라는 코드로 주인공 소년과 모험을 하잖아요. 그래서 전 아이코가 인문학이라는 코드로 악동이와 모험을 하는 설정을 잡았어요."

이희재는 ‘상을 못 받을만한 작품은 아니다’라면서도 여전히 상금이 있는 상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상금 역시 직접 수령하지 않았다. '어린이 만화 발전'을 위한 사업 기금으로 사용해 줄 것을 청했고 주최측인 부천만화정보센터는 아동들의 일기를 공모 받아 만화작가들이 이를 만화로 그려서 출판하는 형식의 사업에 사용하기로 하고 관련 업무를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의 결과물은 오는 9월 23일 열리는 부천만화축제 이희재 특별전(부천만화대상은 그해 수상자의 특별전시회를 다음 해에 개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을 통해 공개 될 예정이다.

기적 같은 한국만화 100주년, 만화가 색다른 영감을 제공할 거예요

"몇 년 전에 프랑스의 카스터만 출판사 편집장이 집에 왔어요. 일본작가 다니구치 지로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며 작품을 직접 해보자는 제안을 했죠. 4, 50페이지 분량의 앨범을 하자고 했어요. 지금 제 나이에 작업할 수 있는 최상의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처럼 정기적으로 연재를 하거나 전집만화를 그리는 식의 ‘양’ 중심 창작을 하기는 힘들어요. 기량이 높아졌을 때 최고의 집중력으로 1년에 한 두 권정도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못하고 있어요(웃음). 올 초에 또 왔길래 '확실하게 기다려 달라'고 했죠." 이희재는 개인 작업은 뒤로 미루고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만화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100주년 집행위원장을 하고 있어요.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시간은 다가오고 늘 아쉬운 상태에서 문을 열어요. 그런데 이런 기회가 있어서 만화 100년을 돌아보니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만화는 일제 때 시작해서 해방, 한국전, 군사정권, 유신과 독재를 거쳤어요. 자유로운 상상과 풍자가 만화의 매력이다 보니, 시기별로 필화도 많았고 검열도 극심했죠. 양식 없는 출판장사치들의 잇속으로 인해 만화시장이 초토화되기도 했고요. 만화는 기도 못 펴고 매일 두들겨 맞았죠. 그런데도 100년을 살았으니 이게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적 같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희재는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2009년 6월 3일부터 전시되었던 '한국만화 100년전'(8월23일까지)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줄 것을 당부했다. "우리만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찬찬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50년대 말과 60년 대 초 우리 만화를 눈여겨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죠. 정말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봐도 진기할 만큼 독특한 소재가 많습니다. 지금 세대들에게도 뭔가 색다른 영감을 제공하리라 믿습니다. 또 최근에 만화창작과 소비환경이 디지털로 많이 전환됐어요.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창작 방향에 대해 묻자 이희재는 화실 한 쪽에서 그간 틈틈이 작업했던 그림을 꺼냈다. 지난해 촛불 집회 현장에서 박재동과 함께 그렸던 작품도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의 유명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그렸던 그림도 있었다. 병풍식으로 접히는 화첩 한 권에 한 장소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다. 화첩을 펼치자 2, 30면 가량의 그림이 기다랗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한 면 한 면 현장에서 붓을 이용해 그린 화첩을 펼치자 거대한 산이 되고 바다가 됐다. "나중에 특별전 할 때 공개할 생각으로 짬 날 때마다 작업하고 있어요. 옛날에 김용환 선생님이나 김성환 선생님이 그린 풍속화를 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 시절이 그림 속에서 숨 쉬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우리의 도시나 자연 풍경을 이런 식으로 담아두고 싶어요. 이 작업을 하다 보니까 세로로 길게 작업하는 웹툰이 생각나더군요. 웹툰도 이렇게 가로로 길게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이희재는 서정성 넘치는 유럽식 앨범만화와 함께 풍부하고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접이식 화첩만화를 중심으로 차기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이 변해서 웹툰이 유행이지만 ‘디지털형식보다 디지털적 사고가 중요하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 만화계에서는 웹툰의 발전과 함께 인터넷이 수용하지 못하는 형식의 만화가 새롭게 부각될 수 있다는 취지의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그 시절의 ‘바른만화’처럼 그의 손을 통해 우리 만화계를 긴장시킬 수 있는 색다른 ‘만화선언’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글 박석환 / 부천만화정보센터 차장, 만화규장각 전문필자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대중문화를 전공했다. 97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만화평론으로 등단한 이후 [잘가라 종이만화], [코믹스만화의 세계], [만화리뷰쓰기] 등 다양한 만화평론서를 발표했다. 블로그_ blog.naver.com/comicspam

사진 김덕화

발행일 2009.06.19

* 게재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korean/cartoonist/636


[인터뷰 후기]

오랜만의 포스팅입니다. 그간 또 바빴습니다.

최근에는 부천만화정보센터 쪽 일이 많습니다. 업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

한국일보와 공동으로 추진한 '기전문화원형 만화창작화사업'의 당선작 선정(전세훈 작, <물 위를 뛰다>) 및 연재 진행 관련 정리 작업을 했고... 좀 많이 심플하게 바뀌었지만 '코믹타운 www.comictown.co.kr '의 리뉴얼 프로젝트를 진행했고요... 고전명작만화 원작의 디지털화 작업과 명작만화패러디공모전, 카툰콘텐츠 개발/ 단편웹툰 제작 기획 등등의 업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시작하지 못한 몇몇 굵직한 일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지난 6월 19일에 게재됐던 이희재 선생님 인터뷰 후기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다른 어떤 작가분들의 인터뷰 때보다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원고에 다 담지 못한 터라 꼭 정리해두고 싶었는데 말이죠...

* 인터뷰 당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으로 온 국민이 충격에 빠져있던 때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가용을 이용해 인터뷰 장소인 선생님 댁으로 이동 중 외곽순환도로의 한 터널 안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옴짝달싹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재난(?) 지역을 빠져나와 선생님 댁에 도착했었죠.

선생님은 거실 한켠에 고인이 된 노무현 전대통령의 넋을 기리기 위한 나름의 분향소를 만들어뒀더군요.

이희재 선생님은 벽면에 붙여 둔 사진을 보면서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이야기했습니다.

1992년 노무현이라는 정치신인이 민정당의 허삼수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붙는다 소식을 듣고 '그 용기와 정치적 철학에 감동'해서 직접 선거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내가 만화가인데 돕고 싶다'고 했더니 벽에 붙은 사진을 보내주면서 선거홍보용 만화를 그려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14대 총선 낙선을 시작으로 부산시장 낙선, 서울시장 낙선을 거듭했지요. 이희재 선생님은 그때마다 선거 홍보용 만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언제인가 한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낙선인사를 하러 이희재 선생님 댁을 직접 방문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만화계에서도 유명한 야간작업형 작가로 정오나 되어야 일어나시는 분인데 아침 일찍 노 전 대통령이 집 앞에 와서 한참동안 초인종을 눌렀다고 하더군요.

아침이나 달라고 하는데 밥도 없어서 옆집에서 두 공기를 빌려다가 대접했는데 그게 그렇게 미안하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원고료라며 봉투를 내밀기에 '다음 선거에 쓰라'고 돌려보낸 적이 있는데, 지난 대선 때 어느 자리에선가 '내 책 선전을 해주더라'면서 웃기도 했습니다.  

한참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이어가던 선생님은 한동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크게 상심하셨을 것이 분명함에도 선생님은 화제를 돌려가며 인터뷰를 매끄럽게 진척시켜주셨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만화는 주동민 님이 작업하셨습니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3456&seq=12&menuType=&weekday=

이미지 맵

Parkseokhwan.com

박석환(만화평론가, 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교수)

    'Critique/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0개 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