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여성노동자협의회의 이어달리기, 컬쳐뉴스, 2007.01.14


바통 이어 받기로 끝나지 않는 여성의 삶


>>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아내의 생일이다. 아내는 날짜를 기억하는 일에 둔감한 남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몇 일전부터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했다. 회사로 출근할 때처럼 헐레벌떡 퇴근 해주기 바란다며 직접 케이크와 맥주도 준비했단다. 아이들의 저금통을 뜯어 설득 반, 타협 반으로 생일 선물도 받았다고 하니 부족함 없는 가족 이벤트이다. 아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카드 사용 영수증에 한줄 적혔다가 사라져 버리는 내 생일보다는 괜찮아 보인다. 그래도 적잖이 미안하다. 단 음식 좀 먹었다고 아이들의 이를 더 열심히 닦이고, 원고마감에 쪼들리는 남편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쪼르륵 잠자리로 들어가는 아내. 아이들을 재우다  반쯤 잠든 채로 커피를 타오는 아내.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 토막 난 여성의 삶과 일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에서 펴낸 『이어달리기』(정광숙 외, 길찾기, 2006)는 여성과 일에 대한 10가지 이야기를 모은 단편만화집이다. 우리시대 여성노동자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9명의 만화가와 스토리작가가 맡아서 이야기로 옮겼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했던, 그러려니 했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남의 일이라 여겼지만 내 누이와 아내의 일인 10토막의 이야기가 담겼다. 냉동 보관되던 동태 토막마냥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서 전체를 그리지 못했던 여성의 삶, 여성의 일에 대한 문제가 하나의 몸을 이루면서 선명하게 부각됐다. ‘부담스러운 주제를 부담 없는 매체로 풀어나가’기 위해 만화로 엮는 일을 기획했다는 여성노동자협의회장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토막으로 놓여 있어서 ‘감내해야 할 일 아닌가?’ 하고 반문했던 문제들이 전체를 이룸으로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됐다. 


>> 이어 달리기를 쉬고 있는 아내

아내는 내가 군대에 다녀온 사이 두 번째 대학에 진학했을 만큼 장래에 대한 장기적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한 단계적 전략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한 살 많은 아내가 일해서 번 돈을 얻어 담배와 커피를 뽑아 먹던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한심한 놈이었다. 그러던 것이 아내가 임신을 하고 태아의 발길질이 시작되면서 하나둘 뒤바뀌기 시작했다-고백하자면 준비 없는 임신으로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았지만 나는 활기 넘치는 사회 초년생, 장성한 아들, 얄미운 남편, 믿음직한 아빠라는 남성의 길을 쏜살 같이 달렸고 아내는 생각할 겨를 없이 닥쳐오는 비정상(?)적인 상황들과 싸우며 노약자석을 찾는 임부, 한 몸을 둘로 나눈 산부, 아무데서나 수유기를 찾아야 하고 패션의 완성을 포대기로 장식하는 초보 엄마가 됐다. 장기적 목표를 위한 단계적 전략 중 하나였던 두 번째 대학의 졸업은 한참 후에나 아이를 안고 할 수 있었고 책꽂이에 가득했던 전공서적은 아이 책을 꽂기 위해 베란다로 밀려났다. 그사이 몇 번인가 꿈과 상관없는 일을 하기도 했고, 꿈에 그리던 일을 찾기도 했지만 아이를 끌어안고 울기를 몇 번. 둘째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내 친구의 아내,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만 사회를 형성하는 마누라가 됐다. 


<< 『이어달리기』는 무한달리기이다

가을운동회 때 했던 이어달리기는 내 차례가 오면 다음에 뛸 사람이 있는 곳까지 전력질주를 하는 경기였다. 쉬었다가 이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려서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역할 경기였다. 상대보다 늦었다면 자책감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숨만 헐떡여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철퍼덕 주저앉아서 나처럼 빨리 뛰라고 외칠 수 있는 경기이다. 그런데 만화 『이어달리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람쥐의 쳇바퀴마냥 제 역할이 끝나지 않는 경기이고 바통을 줄 사람이 없는 무한달리기이다. 

여성의 삶을 중심축으로 여성과 여성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 편씩 이어 붙인 이 만화의 외형적 형식과 이 같은 이야기가 계속 되어서 남성들에게 폭넓게 이해되기를 바라는 엮은이의 마음은 분명 이어달리기에 있다. 그러나 한 편 씩 만화화 된 여성노동자들의 사례는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바통을 넘겨주면 끝나는 이어달리기와는 달랐다. 

직장은 남성의 자아실현을 돕도록 여성을 학습시키고 성별에 따른 사회적 능력차를 확인 시켜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프로그램이다(김 차장의 직장생활백서). 여성의 결혼과 임신은 축하의 대상이지만 업무 공백이 큰 출산휴가와 생산성에 차이가 클 수밖에 없는 출산 후 업무복귀는 직장 파괴행위이고 이혼한 여자와 아이는 경계의 대상이다(저 아이 가졌어요, 육아전쟁, 싱글맘). 단순, 저임금 여성 노동자의 공급은 비정규직이라도 신규 수요를 대체하고 남기 때문에 굳이 정규직을 둬서 고정비를 늘릴 이유가 없다(하루, 나는 사랑으로 달린다, 기나긴 이력서, 몸살, 그래도 일하는 내가 좋아). 문맥만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이 주장들은 열 편의 사례 속에서 증언되고, 동의를 요구하거나 선언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사회에 내재된 다양한 윤리적 기준과 경제적 요인들로 인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직장 신화이다. 만화는 이 같은 신화를 꼬집고 그 부당함에 대해 고발한다.  


>> 아내의 꿈은 이어 달리지 못한다

아내는 냉장고를 애용한다. 뭐든 한 끼에 먹을 만큼의 크기로 썰어서 랩으로 싸둔다. 나는 신선도에 문제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아내는 괜찮다고만 한다. 싸게 사려면 마트에 가야하고 꽤 먼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간다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사야 한다. 그런데 마트에서는 대용량으로만 판다. 다양한 보관 기술이 느는 대신 음식의 신선도는 떨어진다. 나는 아내의 일에 대한 꿈도 신선도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아내라는 사람이 다양한 보관기술이 있기 때문에 그 꿈을 잘게 썰어서 냉장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얼마간의 시간동안 꿈을 진행시키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계속 꿈을 잇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믿는다. 그 기간동안 내 꿈과 목표가 직급이 달라지면서 수 차례 성장한 것과 상관없이, 동년배의 여성 동료가 여전히 여직원으로 불리면서 내 앞에 커피잔을 놓고 있는 상황과 상관없이. 이제 둘째가 조금 더 크면 첫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 지녔던 꿈을 위해 이어 달릴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해왔다.  


<< 함께 달릴 수 있는 길 찾기

『이어달리기』는 퍼스트레이디를 외치고 슈퍼맨이 되어주는 것으로 이상적 여성주의자의 역할을 다 한 듯 바통을 넘기려는 나를 포함한 남성 중심적 사회의 허위와 자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은 혼자 먹고 살기 위해서 머리띠를 동여 메고 한 발짝씩 변화를 위해 이어달리기에 참여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의 양육과 교육을 위해서는 기존 시스템에서 한시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여성이고 보면 ‘여성의 일은 여성의 삶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기존 신화 앞에서 억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신화는 반복될지 모를 일이다. 

『이어달리기』의 이야기가 여성 문제에 대한 정보와 감동을 주고 새로운 성찰을 이끌어내지만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동의와 현장에서의 실천적 활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여성들의 이어달리기는 진전 없는 멤 돌기로 끝날 것이다. 무한괘도에서 이어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는 그들을 내려줘야 한다. 함께 달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엮은이의 도움으로 읽은 이의 몫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컬쳐뉴스, 민예총, 2007. 1. 14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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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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