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이 만화를 발견하다] 최병열의 '삐따기', 한국일보, 2004.3.23

만화대여 활성화에 한몫

고교무대 학원액션 대전 98년 첫선, 곧 25권 나와


외환위기 시절 소점포 창업열풍과 함께 등장한 것이 책 대여점이다. 전국적으로 1만 여 개 소에 이르는 이 점포의 주요 대여상품은 만화책이었다. 

개인대상 판매용 도서의 대여에 대한 금지법규가 없었기 때문에 판매용 만화를 제작한 출판사와 판매부수에 따라 인세를 받는 만화가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 그래서 만화작가 단체를 중심으로 오랜 공방 끝에 저작권법에 ‘도서상품의 대여권리를 부여하는 조항’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새로 출간되는 만화책의 경우 이르면 6월부터는 빌려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만화가 최병열의 ‘삐따기’는 책 대여점이 동네 미장원 수만큼이나 많이 생겨나던 그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만화 출판사들은 판매용이 대여용으로 배포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제작기간을 단축한 대여점용을 따로 만들기까지 했다. 정통 학원액션물을 표방한 ‘삐따기’는 그 시절 출판사의 급조된 마케팅전략에 의해 빛을 본 걸작이다. 

대체로 만화책은 만화가의 작업기간을 고려해 2개월에 1권 발행되는 것이 정석이지만, 그 때는 월 1, 2권이 발행됐다. ‘삐따기’ 역시 1998년 1권 발행 이후 8권까지 매월 1권씩 나왔다. 소비위축이 장기화하면서 수익성 악화로 출판사가 관련사업을 중도포기하자, 11권부터는 출판사를 옮겨 정상적인 속도로 작업 중이다. 

‘삐따기’는 100대 5의 싸움에서 이긴 댄싱팀 엔젤파이브와 팀의 리더 강혁이 펼치는 ‘학원액션 대전’을 소재로 했다.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고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고 있는 강혁은 고교 주먹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괴물. 이야기는 거대한 허풍으로 시작하지만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은 여타의 학원액션만화에 등장하는 ‘맘씨 좋고 싸움 잘하는 주인공’보다 현실적이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듯 싸움은 착한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 코드를 입힌다. 수줍은 고교생이었다가 충격을 받으면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전설의 주먹꾼이 되는 것이다. ‘안… 싸워, 싸워…’를 거듭하던 초기 설정은 작품이 장기화하면서 많은 부분 퇴색됐지만, 독특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속도감 있는 재미는 그대로이다. 

빨리 만든다고 다 졸속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제작기간 단축이 작품의 질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스토리의 연속성에 대한 기대심리가 커지고, 출판사 입장에서는 상품의 생명주기가 연장되는 효과도 있다. 

만화가 최병열은 이 같은 장점을 ‘삐따기’의 앞부분에서 성공적으로 보여줬고, 책 대여점 활성에 힘을 보탰다. 총 24권이 발행됐고 곧 25권이 나올 예정이다. 대여권 도입은 곧 대여점의 연쇄폐업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면 이 작품의 후속권이 개인용으로 더 많이 팔릴까? 지켜봐야 할 일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한국일보, 2004-03-23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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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교수(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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