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이 만화를 발견하다] 김정수의 불문율, 한국일보, 2004.1.27

`강자에게 굴욕이란 없다`

왜정·美군정과 겨뤘던 두 사내의 주먹이야기

그나마 작곡가 박인호와 가수 정광태가 용감하게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쳤던 건가.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그들이 노래해준 덕분에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믿게 된 것은 아닌가. 일본은 총리가 직접 나서서 ‘러일 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흘러간 옛 노래만 되풀이하고 있다. 

만화 ‘불문율’의 주인공은 ‘강한 자는 굴욕을 당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것은 못난 짓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강하지 못한가. 내 나라 내 땅을 내 것이라 주장할 사내는 없는가. 

김정수의 만화 ‘불문율(글 현강석)’은 소설 ‘장군의 아들’, 드라마 ‘야인시대’와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 두 작품이 해방 이전 주먹계의 큰형님이었던 김두한과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했던 김두한을 다뤘다면 ‘불문율’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왜정에 맞선 주먹 ‘임대호’와 미군정과 겨룬 주먹 ‘김창수’를 그린다. 두 명의 낯선 사내는 역사로 기록된 당대의 주먹과 사내로서 대결하고, 외압에 맞서 조선인으로서 대항했다. 

작가는 역사적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수의 가상 인물을 통해 당대의 급박했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한다. 가령 대호는 어린 김두한에게 ‘지고는 살 수 없는 사내의 삶과 주먹’을 가르치고 어른이 되게 한다. 시라소니와는 만주에서 피를 나눈 의형제 결의를 하면서 ‘나는 그들(조선사람)의 피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피 한 방울도 섣불리 내 놓을 수 없다며 항일 의지를 불태운다. 

해방 후 김두한 이야기가 정치현실로 옮겨 간 것과 달리 이 작품은 김두한의 의형제 창수를 미 군정 하에서 설움 받았던 민초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나라가 없고 사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딸과 누이는 양공주가 되고, 아들과 동생은 슈샤인보이(미화원)가 됐다. 작가는 당시의 사회면을 더럽힌 사건을 나열하고 나라 없는 이들 속에 창수라는 사내를 세운다. 

‘불문율’은 1995년 1권 발표 이후 현재 33권의 이야기가 진행 중인 미완의 작품이다. 스토리 작가 현강석이 ‘힘의 논리’로 강한 사내의 당위성과 폭 깊은 낭만을 이끌었다면 그림 작가 김정수는 굵직한 펜화와 역동적 연출로 ‘빼앗기지 않는 사내들’ ‘굴욕 당하지 않았던 사내들’을 그려냈다. 

두 명의 가상인물은 김두한을 비롯한 일부 세력만이 사내답게 싸웠던 것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강한 사내’가 많았고, 그들이 곧 ‘강한 조선인’이었다는 상징으로 읽힌다. 김정수는 이 작품만 10여 년째 작업하면서 1년에 3권 미만을 발행할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다. 그 덕에 이 작품은 출판 불황에도 불구하고 ‘열혈강호’ ‘짱’ 등과 함께 권당 2만부 이상이 꾸준히 판매되는 ‘미완결 스테디셀러’가 됐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an.com)



한국일보, 2004-01-27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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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교수(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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