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가가 죽어야 만화가 산다

만화산업에 대한 기대가 만화문화를 살찌우고

1990 년대 만화계의 최대 이슈는 '문화산업'이라는 신조어였다. 문화를 산업적으로 이해하고 달려드는 장사치들에게 비수를 날렸던 세상이 이들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문화의 산업화'와 '산업으로서의 문화', ‘돈 버는 문화’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창조해낸 작품에 가격표를 붙이는 것을 거부하고 국가의 관리와 지원 하에서만이 예술의 꽃이 핀다고 주장했던 예술인들. 이들이 갑자기 '문화생산자'라는 지칭을 시대의 훈장처럼 거머쥐고 '신지식인'이라는 휘호를 들고 나왔다. 이때 만화는 '코 묻은 돈 장사'라는 동료들의 따돌림에서 벗어나 갑작스런 밀어주기에 정신없이 문화산업호에 몸을 실었다. 문화산업호의 출항 계획은 그 방대한 규모부터 화제였다. 저마다의 목적과 환상을 일거에 이룰 듯 한 기세였다. 

고작해야 출판시장의 변방에서 책 팔아 남긴 돈이 전부였던 만화매체의 수익선에도 일대 변화가 일었다. 출판만화의 판매부수에 대한 시장 가치가 잡히고 실제 수치들이 들어 나면서 빙산의 일각보다 못한 출판만화 판에서 '쌈박질'하고 있었던 선수들이 빙산의 밑으로, 수면 밑의 거대한 시장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로서 만화산업은 문화산업의 최전방에 위치한 전사와 같은 모습으로 재인식됐다. 그에 걸맞게 만화관련 산업군들이 하나 둘 시장의 논리에 따라 '나와바리'를 형성하며 등장하기 시작했고, 캐릭터나 애니메이션 같은 덩어리는 출판만화의 외소증을 비웃을 정도로 거대한 모습이 됐다. 

출판만화 영역을 기준으로 작가 쪽에서는 제작 파트별 전문작가(배경, 데생, 터치, 스토리, 일러스트, CG)가 등장하고 캐릭터, 웹애니메이션 등 소규모 스튜디오 시스템 하에서 할 수 있는 작업영역이 생겨났다. 

출판사 쪽에서는 기존 판매망 외에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도서상품 판매망과 만화 작품의 디지털 변환 작업을 중점으로 캐릭터 머천다이징, 애니메이션 제작 등에 따른 인력과 시장이 형성됐다. 작가와 출판사를 축으로 진행된 살 붙이기 작업은 만화교육이라는 새로운 시장과 만화언론, 만화행사, 아마츄어 만화계, 만화 메니지먼트 등 만화관련 산업을 눈덩이처럼 부풀려 놨다. 


만화문화의 파급이 기존 만화산업의 형질 변화를 이끌어

현재 만화는 '만화책'이라는 형태적 요소에서 자유로워졌다. 만화는 꼭 책이어야 가능한 것도 종이 위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또, 만화는 구성적인 측면에서도 자유롭다. 만화는 꼭 칸들의 연결로만. 움직임이 느껴지는 정지영상의 안배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화의 자유로운 행보는 종이를 벗어나 천, 프라스틱, 철제 등 어디에도 삽입된다. 디지털시대의 전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만화도 존재하게 한다. 구성적 측면에서도 만화의 전형성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진화해있다. 

'만화적 이미지의 홍수 시대'일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미술의 영역 또는 시각문화의 측면'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매듭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옛날의 미술패들이 자신했던 영역 논쟁에 이제 만화도 참가할 정도가 됐고 '이것은 만화다' 또는 '이것도 만화다'라고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됐다. 만화산업의 등장과 만화문화의 파급이 이끌어낸 결과인 것이다. 

변화는 여기부터이다. 결론적으로 '역대 최저 불황'이라고 말하는 2001년 만화판의 최대 문제는 속도였다. 만화의 산업화 속도와 비대해진 덩치는 주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만화산업 시대를 이끈 '개국공신'들은 기존의 영역을 지키기에도 손이 모자랐다. 만화로 편입되었거나 기존의 영역에서 분할 발전한 만화판을 '남의 나무 열매 보듯' 지켜볼 뿐이었다.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의 불행은 '아날로그 시대의 종말과 디지털사회로의 진입시기'에 걸쳐 만화산업 시대가 왔다는 점이다. 아날로그적 마인드로, 아날로그적으로 만들어낸 만화산업 시대였으나 디지털사회는 '아날로그적 생산물'을 임의로 전환시키거나 스스로 디지털적으로 진화시켰다. 결국 아날로그적으로 구축된 성과가 만화산업 시대를 이끌긴 했지만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이 아날로그의 변화 또는 도태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컴퓨터 기기는 작가의 창작 수단이 됐고 인터넷은 편집자의 다리가 됐다. 작품의 기획, 창작, 제책 과정에 컴퓨터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됐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구축된 게임과 인터넷 미디어는 만화독자의 구독법에 변화를 가져왔고, 작품의 창작 방향이나 연출법의 변화도 이끌었다. 출판사와 총판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바뀌는 유통방식에 적응하느라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디지털 사회의 만화산업 시대가 출판만화산업의 기존 질서와 체제에 심각할 정도의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만화산업의 주축인 작가는 소외되고

디지털 사회로의 진입은 만화창작의 내외적인 요소 변화와 이를 운용하던 인력 구성의 재배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만화관련 산업의 큰 덩어리가 세포 분열을 하듯 흩어져서 저마다의 독립인자로 자리하는 동안 기존 만화산업은 보이지 않는 혼란과 침체에 빠져들었다. 

90 년대 출판만화의 새로운 부흥기에 등장한 신진작가들은 2000년을 맞이하며 중견 작가 이상의 인지도와 상품성을 인정받고 있으나 그 덕에 만화전문 출판사들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고 있다. 20대 초반에 등장한 이들 작가군은 적은 원고료 대비 높은 생산력과 판매고를 보이면서 20세기 말 '새로운 만화 부흥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지금 이들 작가의 원고료는 상당히 높아졌고 전과 같은 효율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반적인 경기 불황의 여파는 이들 중 가장 상품성이 높다는 작품의 판매고 마저 떨어뜨렸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너무 커버린 그 옛날의 작가 대신 '어린 작가' 찾기로 돌아서고 있다. 그 결과 1990년대 이전에 등장한 작가의 경우에는 이미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출구가 막혀있는 상황이고, 전문잡지를 꾸려가고 있는 출판사들은 슬그머니 세대교체를 진행 중에 있다. 

작가들 스스로 자기 경쟁력을 약화시킨 꼴이다. 출판만화 외적 영역에서 만화산업군의 주도세력 역시 더 이상 만화작가가 아니다. 만화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만화 상품 자체의 경쟁력과는 상관없이 '구색 찾기'에만 전념한다. 유명 만화가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비싸다면) 비전문가 영역에서도 충분히 구색을 맞출 수 있다. 더군다나 몇 차례 증명된 '신출내기들에 의한 대박'은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영역을 따로 두지 않고 있다. 

역대 어느 시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만화의 시대에 만화가들은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정할 수 있는 길은 아날로그의 신화를 지우는 것이다. 

손 맛으로 구축한, 방대한 량으로 이룩한 만화산업이 아니라 질적 우수성과 다양한 상품군을 염두에 둔 사전 기획, 한정된 공간과 구독층이 아니라 드넓은 세계와 다연령층을 지향한 작품 창작 등. 

단순히 종이를 버리고 비트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이라도 디지털 사회에서의 사용방법에 맞게 써야 하며, 종이에 입각한 사고로 비트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만화가들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거부하고 종이라는 상징적인 관습을 신격화시키고 있다. '만화의 홍수 시대에 왜 만화가의 궁핍은 계속되는가?'라고 묻는 것은 선문답에 불과하다. 기성의 것을 버리고, 아날로그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면 만화가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기성의 신화가 버리기 힘든 것이라면 디지털 사회에서 만화가의 죽음보다 만화의 죽음이 먼저 올 것이다. 기성의 만화가 스스로 '이것만이 만화이다'라고 말하고 '이것만'의 작업을 지속한다면 변화의 속도에 맞춰 '이것만이 만화'는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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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교수(한국영상대 만화콘텐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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